저녁에 책상을 정리하다 다이어리를 펼쳤어요. 첫 장에 연초에 적어둔 목표 다섯 개가 있었지요.
다 읽어보니 지운 줄이 하나도 없었어요. 운동, 저축, 자격증, 여행, 독서. 하나도 제대로 못 한 거였네요.
벽에 걸린 달력도 얇아져 있었어요.
몇 장 넘기면 끝이더라고요. 그걸 보니 갑자기 조급해졌지요. 남은 몇 달 동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마음만 바빠지네요.
이맘때가 되면 늘 이런 마음이 들어요.
한 해 동안 뭘 했나 싶은 거요. 바쁘게 산 것 같은데 손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지요. 다른 사람들은 다 뭔가를 이뤄낸 것 같고요. 그 비교가 조급함을 더 키우더라고요.
한 해가 기울 때 드는 조급함은, 대개 해낸 것이 아니라 계획했던 것만 세고 있어서다.
그런데 목표 다섯 개 옆에 여백이 있었어요.
거기에 연필로 다른 걸 적어봤지요. 계획에 없었지만 해낸 일들이요. 도자기 수업을 시작한 것, 뜨개질을 배운 것, 오래 연락 안 하던 친구에게 먼저 연락한 것, 이직 준비를 시작한 것까지요. 적다 보니 여백이 꽤 찼네요.
쇼펜하우어는 삶이 우리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기본이라고 했대요.
처음엔 그 말이 쓸쓸했어요. 그런데 다이어리를 보니 그 말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지요. 계획대로 안 됐지만, 계획에 없던 것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으니까요.
남은 달력 몇 장을 다 채우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어요.
조급해서 뭔가를 억지로 시작하면 또 금방 지칠 것 같아서요. 대신 남은 시간 동안 여백에 한 줄씩 더 적어보려고요. 작은 것이라도요.
한 해가 기울 때 조급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래도 계획대로 되지 않은 한 해에도 계획에 없던 것들이 채워져 있어요. 오늘은 목표 옆 여백부터 읽어봐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