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옷장 정리를 했어요. 회색 니트 하나를 버릴 옷 봉투에 넣었지요.
소매에 보풀이 잔뜩 일어나 있었고 목도 조금 늘어나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흘 뒤 저는 그 니트를 다시 꺼내 소매의 보풀을 하나씩 떼고 있더라고요.
이 니트는 해마다 버릴 후보였어요.
정리할 때마다 이제 보내야지 하면서 봉투 앞까지 갔다가 멈추지요. 꼭 이번 한 철만 더 입자고 하면서요. 그렇게 몇 번의 가을을 넘겼는지 모르겠네요.
처음에는 그냥 편해서라고 생각했어요.
오래 입어서 몸에 맞게 늘어났으니까요. 그런데 새 니트도 금방 편해지잖아요. 그러니 편한 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던 거겠지요.
소매를 만지다가 알게 됐어요.
이 니트를 입고 이사를 했고, 이걸 입고 친구 결혼식 뒤풀이에 갔었지요.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책을 읽던 오후도 이 니트였고요. 보풀 하나하나가 그 날들을 지나며 생긴 거였네요.
오래 입은 옷은, 입은 사람이 지나온 날들을 올올이 기억한다.
버리려다 멈추는 건 옷이 아니라 그 날들을 놓기가 아쉬워서였군요.
그날 저녁 보풀 제거기를 꺼냈어요.
소매부터 천천히 밀었지요. 회색 털뭉치가 조금씩 모이는 걸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더라고요. 다 떼고 나니 새것까진 아니어도 한 철은 더 입을 만해 보였어요.
물론 영원히 입을 수는 없겠지요.
언젠가는 팔꿈치가 해지고 실이 풀리는 날이 올 거예요. 그때는 조금 덜 아쉽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충분히 입었다는 걸 알 테니까요. 미련은 대개 덜 쓴 것에 남더라고요.
그러니 올가을도 이 니트와 함께 보내기로 했어요.
누가 보면 낡은 옷이겠지만 저한테는 제일 따뜻한 옷이네요. 못 버리는 걸 너무 탓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직 그 옷이 할 일이 남아 있는 거겠지요. 한 철 더 입어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