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데 우산을 안 폈네요. 가방 안에 있는 걸 알면서도 손이 안 들어갔어요.
그렇게 몇 분을 걸었어요.
꺼내는 게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몇 초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날은 비가 싫지가 않았습니다. 얼굴에 닿는 게 오히려 시원하고요. 그런 날이 일 년에 몇 번 있습니다.
같은 비도 어떤 날은 피해야 할 것이고, 어떤 날은 그냥 맞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비에 따라 다르더라고요.
가늘게 오는 비는 몇 분 맞아도 크게 안 젖어요. 굵은 비는 몇 초면 다 젖고요. 그날은 앞엣것이었고, 그래서 가능했던 겁니다. 아무 날에나 되는 건 아니고요.
다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봅니다.
우산이 없는 줄 아는 거겠지요. 있는데 안 편 거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그 몇 분은 좀 이상한 사람이 된 채로 걷게 됩니다.
들어와서 머리가 젖어 있으면 살짝 후회도 하는걸요.
말려야 하고 옷도 걸어둬야 하니까요. 그 십 분이 추가로 드는 겁니다. 그래도 걷던 몇 분이 좋았으면 그 정도는 낼 만하더라고요.
이걸 늘 하는 건 아니네요.
대개는 그냥 폅니다. 다만 일 년에 몇 번, 그러고 싶은 날이 오면 안 펴고요. 그런 날이 오는 것 자체가 기운이 좀 남아 있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비를 그냥 맞고 다녔어요.
우산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그게 재밌어서이기도 했고요. 언제부터 꼭 펴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걸요. 젖으면 곤란한 일이 늘어나면서 그렇게 된 거겠지요.
젖고 들어와서 바로 씻으면 대개 아무 일 없더라고요.
그게 되는 날에만 하는 거고요. 다음 일정이 있는 날에는 당연히 폅니다. 우산을 안 펴는 건 그날 뒤가 비어 있을 때만 가능한 사치인 셈이군요.
우산을 안 편 날은 게을렀던 게 아니라 그날 그게 맞았던 거겠지요.
늘 그러면 감기에 걸리겠지만요. 오늘 비가 싫지 않으셨다면, 몇 분쯤은 그냥 걸으셔도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