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펜이 흐려졌는데도 계속 쓰고 있었네요. 서랍에 새 게 다섯 자루나 있는데요.
글씨가 잘 안 나와서 두 번씩 그으면서 썼네요.
값을 아끼는 건 아닌걸요. 몇백 원짜리라서요.
바꾸는 게 귀찮은 것도 아니더라고요. 서랍을 열면 되니까요. 그런데도 안 바꾸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그 둘은 아니었던 셈이군요.
손에 익은 것은 좋아서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쓰는 동안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펜은 잡는 느낌이 이미 정해져 있네요.
굵기가 어떤지, 얼마나 눌러야 나오는지가 손에 들어 있는걸요. 새 걸 꺼내면 그걸 다시 익혀야 하고요. 몇 줄이면 익겠지만 그 몇 줄이 귀찮은 게 아니라 낯선 겁니다.
또 하나는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다 쓰지도 않고 새 걸 꺼내면 뭔가 중간에 그만둔 것 같더라고요. 끝까지 쓰면 그 펜 하나는 제가 다 쓴 게 되고요. 그런 게 하루에 하나쯤 있으면 좋더라고요.
물론 흐린 펜으로 쓰면 글씨가 지저분해집니다.
두 번 긋게 되고 손도 더 힘이 들어가네요. 남한테 보여줄 걸 쓸 때는 새 걸로 바꿉니다. 저만 볼 거면 흐린 채로 끝까지 쓰고요. 그 정도로 나눠 쓰고 있습니다.
이상한 건 다 쓰고 나면 미련이 없다는 거군요.
끝까지 썼으니 그냥 버리는걸요. 오히려 절반쯤 쓰다 만 펜이 서랍에 굴러다니면 그게 오래 남더라고요. 끝을 못 본 게 남는 셈이지요.
생각해보면 펜만 그런 게 아니에요.
가던 가게를 계속 가고, 앉던 자리에 계속 앉고요. 더 나은 데가 있을 수도 있는데 안 찾아봅니다. 익숙한 걸 쓰는 동안에는 고를 일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요.
하루에 고를 게 이미 많으면 나머지는 손에 익은 대로 가게 되더라고요.
끝까지 쓴 펜에는 그동안 쓴 것들이 다 들어가 있겠지요.
무슨 대단한 걸 쓴 건 아니지만요. 오늘 손에 익은 걸 계속 쓰고 계신다면, 그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 사이에 결정을 하나 덜 해도 되기 때문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