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면담 서류를 받았어요. 맨 아래에 오 년 뒤 목표를 적는 칸이 있었지요.
펜을 들고 한참 그 칸을 봤어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결국 그 칸만 비워서 냈네요.
다들 몇 년 뒤를 그리며 산다고들 하지요.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있을지요. 그런데 저는 그게 잘 안 그려져요. 내일이나 다음 주 정도는 보이는데 그 너머는 뿌옇네요. 그게 가끔 불안했어요. 나만 길을 모르는 것 같아서요.
주변을 보면 다들 계획이 있어 보였어요.
누구는 몇 년 안에 이직을 하겠다고 하고, 누구는 집을 옮기겠다고 하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 제가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나중에 한 동료가 슬쩍 말하더라고요. 자기도 그 칸 대충 썼다고요. 다들 아는 척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앞날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자기 앞날을 계획대로 살 수 없다고 봤대요.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의 기본값이라고요. 처음엔 차갑게 들렸어요. 그런데 오히려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안 보이는 게 제 잘못이 아니라 원래 그런 거라면,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오 년 전의 저를 떠올려봤어요.
그때도 지금을 상상하지 못했지요. 이 동네에 살 줄도, 지금 일을 할 줄도 몰랐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네요. 그려지지 않았던 길이 한 걸음씩 걸어지긴 했던 거군요.
요즘은 멀리 보는 대신 내일을 그려봐요.
내일 아침에 뭘 마실지, 퇴근길에 어디를 들를지 정도요. 그건 잘 그려지거든요. 그렇게 하루씩 그리다 보면 조금씩 앞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앞날이 막막한 건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서겠지요.
안개 속에서는 몇 걸음 앞만 보이지만 그 몇 걸음은 걸을 수 있어요. 막막한 밤에는 이렇게 같이 앉아 있어도 되고요. 오늘은 내일 하루만 그려봐도 충분한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