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샤워를 하다가 머리를 헹구는데 거품이 유난히 많더라고요. 샴푸를 두 번 칠한 거였어요.
그 사이 저는 낮에 하지 못한 대답을 머릿속으로 세 번이나 다시 하고 있었네요.
샤워할 때는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져요.
물소리가 다른 소리를 다 덮어주니까 그런가 봐요. 휴대폰도 없고, 누가 말을 걸지도 않지요. 그 안에서 낮의 일들이 하나씩 되감기더라고요. 했던 말, 못 한 말, 표정 같은 것들이요.
제일 자주 떠오르는 건 못 한 대답이에요.
낮에 누가 무심하게 던진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했던 순간이요. 샤워기 아래서는 그럴듯한 대답이 술술 나오지요. 이미 늦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세 번이나 다시 해본 거였군요.
늦게 떠오른 대답은, 그 순간을 마음이 아직 놓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후회만 떠오르는 건 아니에요.
가끔은 며칠 동안 안 풀리던 일의 실마리가 툭 떠오르기도 하지요. 친구한테 해주고 싶던 말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머리를 비우려고 한 게 아닌데 저절로 비워진 자리에 뭔가가 들어오는 거겠지요.
쇼펜하우어는 마음이 무언가를 애써 쫓지 않을 때 오히려 생각이 맑아진다고 했대요.
샤워할 때가 딱 그런 시간 같아요. 뭘 해결하려고 서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냥 따뜻한 물을 맞고 있을 뿐이지요. 그 사이에 하루가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것 같네요.
신기한 건 샤워실을 나오면 그 생각들이 금방 흐려진다는 거예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다 보면 아까 그 대답이 뭐였더라 싶지요. 그게 오히려 다행이더라고요. 다 붙잡고 나왔다면 밤새 곱씹었을 테니까요.
샤워 시간이 길어진다고 가족에게 한소리 들은 적도 있어요.
그래도 그 몇 분은 마음이 스스로 정리하는 시간 같아요. 따뜻한 물 아래서는 조금 오래 서 있어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