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창가에 앉아 있다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문득 생각났어요. 이유는 없었지요.
휴대폰 검색창에 선생님 이름을 쳐봤어요. 그런데 엔터를 누르지 못했네요. 한참 그 화면만 보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매일 아침 칠판 구석에 같은 문장을 적으셨어요.
오늘도 천천히. 그게 전부였지요. 시험 기간에도, 수능을 앞두고도 그 문장은 지워지지 않았어요. 그때는 왜 그러시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선생님이 저희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말이었던 것 같네요.
검색하면 선생님 소식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겁이 났지요. 너무 많이 변하셨을까 봐, 아니면 아무것도 안 나올까 봐서요. 기억 속 선생님은 그 칠판 앞에 그대로 계셨으면 했어요. 그래서 그냥 화면을 닫았어요.
연락하지 못한 은사는, 기억 속 그 교실에서 여전히 같은 문장을 적고 계신다.
대신 노트를 펴고 그 문장을 적어봤어요.
오늘도 천천히. 적고 나니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더라고요. 요즘 저는 늘 서두르고 있었거든요. 일도, 마음도요. 선생님 말씀이 십몇 년 만에 다시 저한테 온 것 같았어요.
다음 날 고등학교 친구에게 선생님 얘기를 꺼냈어요.
친구가 몇 년 전 동창 모임에서 선생님을 뵌 적이 있대요. 여전히 그 문장을 말씀하시더라고 했지요.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놓였어요. 선생님은 여전히 선생님이셨던 거군요.
쇼펜하우어는 서두르는 마음이 괴로움을 키운다고 했대요.
선생님의 오늘도 천천히, 와 같은 얘기였던 것 같아요. 먼 나라 철학자와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같은 말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연락하지 못해도 그 사람이 남긴 말이 아직 내 안에 있다면 이미 이어져 있는 거겠지요.
오늘은 그 말을 한 번 소리 내어 떠올려봐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