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저는 핑계부터 만들어요. 말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두세 개가 돌아갑니다.
실제로 쓰는 건 하나인데 나머지도 다 준비해두더라고요.
정작 말하는 건 십 초면 끝나네요.
그런데 그 십 초를 준비하는 데 반나절이 가고요. 어떤 말이 덜 미안하게 들릴지 골라보는 거지요. 고르다 보면 원래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도 흐려지는걸요.
거절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거절 자체가 아니라 거절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그냥 하기 싫다고 하면 한 마디로 끝나겠지요.
그런데 그 한 마디는 못 쓰겠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일 것 같고요. 그래서 일정이 어떻고 몸이 어떻고 하는 걸 붙이는 거네요.
핑계를 들은 쪽도 대개 알아차리더라고요.
그래도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거고요. 그러니 이건 속이는 게 아니라 서로 체면을 세워주는 절차에 가까운 모양이네요.
문제는 안 쓴 것들이 남는다는 거예요.
만들어놓고 안 쓴 핑계가 머릿속에 그대로 있고요. 다음에 비슷한 일이 오면 그게 또 올라옵니다. 쌓이면 꽤 무겁더라고요.
지난번에는 핑계 없이 말해봤어요.
못 하겠다고만 하고 이유를 안 붙였고요. 상대는 알겠다고 하고 끝이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반나절이 무색해지더라고요.
한 번 잘됐다고 습관이 바뀌지는 않네요.
다음에도 저는 또 두 개쯤 만들어 둘 거고요. 그게 안심이 되니까 하는 거겠지요.
제가 거절을 당하는 쪽일 때를 떠올려 봤어요.
상대가 긴 이유를 대면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짧게 안 된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걸요. 길수록 뭔가 있는 것 같아서 되짚어보게 되고요. 그러니 제가 공들여 만든 핑계가 상대한테는 더 불편할 수도 있는 거네요.
핑계는 상대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 나를 가리려는 것뿐인걸요.
그러니 준비하는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오늘 거절할 일이 있으시면, 하나만 준비해보셔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