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서 몇 시간 얘기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하루를 통째로 비워뒀더라고요.
저녁에도 아무 약속을 안 잡아뒀던 겁니다.
저는 점심때 잠깐 보는 걸로 생각하고 나갔어요.
그래서 저녁에 다른 일이 있다고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알겠다고 했고요. 나중에 알고 나니 그게 좀 걸리더라고요.
비워둔 시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이 선물인 줄 모르고 지나간다.
왜 말 안 했냐고 물었더니 별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말하면 제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랬겠지요. 그 친구는 늘 그런 식입니다. 해두고 말 안 하는 쪽이고요.
알았으면 저는 저녁 일을 미뤘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평소처럼 일어난 거고요. 그러니 말 안 하는 배려가 늘 좋은 건 아닌 셈이군요. 알려주면 받는 쪽이 맞춰줄 수 있는 거니까요.
반대로 저도 그러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는 날은 앞뒤를 비워두는데 그 얘기를 안 해요. 그러면 상대는 제가 그냥 시간이 남아서 나온 줄 알겠지요. 서로 안 말하고 비워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잡을 때 한마디 붙입니다.
그날은 다른 거 안 잡아뒀다고요. 부담 주려는 게 아니라 정보로 주는 거지요. 그러면 상대가 길게 볼지 짧게 볼지를 정할 수 있고요.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린 게 있어요.
그 친구는 그날 하루를 쓴 셈인데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만났으니 됐다고요. 저였으면 아까웠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비워둔 시간은 눈에 안 보여서 말 안 하면 모르는걸요.
그러니 해둔 사람 쪽에서 한마디 하는 게 맞겠고요. 오늘 누가 나를 위해 시간을 비워둔 걸 뒤늦게 아셨다면, 다음에는 그 사람한테도 그렇게 해보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