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트를 사놓고 몇 주째 비닐도 안 뜯었습니다. 쓸 게 없는 것도 아니었어요.
첫 장을 잘 써야 나머지가 잘 될 것 같더라고요.
노트를 펴면 첫 장이 제일 먼저 보입니다.
나중에 다시 볼 때도 거기부터 보게 되고요. 그러니 첫 장이 어설프면 그 노트 전체가 어설퍼 보일 것 같은 겁니다. 아직 한 글자도 안 썼는데 벌써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셈이군요.
시작을 잘하려는 마음이 시작을 가장 오래 미룬다.
막상 펴도 글씨를 신경 쓰게 됩니다.
줄을 맞추고 날짜를 예쁘게 적고요. 그러다 한 줄 쓰고 마음에 안 들면 그날은 덮어버립니다. 내용이 아니라 모양에서 막히는 거지요.
한 번은 첫 장을 건너뛰고 중간부터 써봤어요.
이상할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오히려 편했습니다. 첫 장이라는 자리가 없어지니까 그냥 종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두 권을 씁니다.
하나는 아무렇게나 쓰는 거예요. 낙서도 하고 줄도 안 맞추고요. 그러다 정리된 게 나오면 그때 다른 데 옮겨 적습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는 자리를 아예 안 만드는 셈이지요.
돌아보면 다 쓴 노트가 별로 없어요.
앞부분만 몇 장 쓰고 만 게 여러 권입니다. 잘 시작하려다 중간에 멈춘 것들이지요. 그렇게 보면 첫 장을 잘 쓴 노트일수록 더 빨리 멈췄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다른 것도 비슷해요.
새로 뭘 시작할 때 첫날을 잘 보내려고 하다가 아예 시작을 못 합니다. 준비가 덜 됐다고 하루를 미루고, 미룬 김에 또 미루고요. 첫 장 앞에서 서 있는 거랑 같은 자리인 셈이군요.
그래서 요즘은 첫날을 아무 날로 치기로 했습니다.
첫 장이 깨끗해야 좋은 노트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끝까지 쓴 노트가 좋은 노트인 거고요. 오늘 뭔가 새로 시작하려다 못 하셨다면, 첫 장은 건너뛰고 두 번째 장부터 쓰셔도 되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