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녁마다 보리차를 끓여둬요. 아침에 그걸 데워 보온병에 담아 출근하지요.
회사에도 정수기가 있지만 집에서 끓인 차가 좋더라고요. 주전자 앞에 서 있던 저녁 시간이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느낌이라서요. 작은 보온병 하나가 가방에 늘 들어 있어요.
사무실 책상에서 보온병 뚜껑을 열면 김이 올라와요.
고소한 보리 냄새도 같이요. 그 순간 잠깐 집에 있는 것 같아요. 모니터 불빛과 키보드 소리 사이에서 부엌 냄새가 나는 거니까요. 바쁜 오전에도 그 냄새를 맡으면 숨이 조금 쉬어지더라고요.
신기하게 오후가 돼도 따뜻해요.
어느 날은 오후 네 시에 뚜껑을 열었는데도 김이 올라왔지요. 옆자리 동료가 그걸 보고 신기해했어요. 그거 집에서 가져온 거야? 하고요. 한 잔 따라줬더니 맛있다며 다 마셨네요.
보온병 뚜껑을 열 때 올라오는 김에는, 아침의 내 부엌이 같이 따라와 있다.
보온병을 챙기는 건 귀찮은 일이에요.
아침마다 차를 담고, 저녁엔 씻어 말려야 하지요. 그래도 이건 계속하고 싶어요. 회사에서 제가 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라서요. 다음 달 팀이 바뀌어도 이 보온병은 그대로 들고 갈 거예요.
며칠 뒤 옆자리 동료도 보온병을 들고 왔어요.
자기도 집에서 차를 끓여봤대요. 생강차였지요. 서로 한 잔씩 바꿔 마셨어요. 사무실 한쪽에 작은 찻집이 생긴 것 같았네요. 둘이 웃으며 오후를 버텼어요.
어릴 때 엄마도 보온병을 들려 보내셨어요.
소풍 갈 때마다 따뜻한 보리차를 담아주셨지요. 그때는 그게 당연했어요. 지금 제가 저한테 보온병을 챙겨주고 있는 셈이네요. 엄마가 하던 일을 이제 제가 하고 있었던 거예요.
쇼펜하우어는 큰 행복보다 작은 즐거움들이 하루를 지탱한다고 했대요.
보온병에서 올라오는 김 한 줄기가 딱 그런 즐거움 같아요. 그게 하루의 중간을 따뜻하게 받쳐주더라고요.
보온병 뚜껑을 열 때 올라오는 김에는 아침의 내 부엌이 같이 따라와 있지요.
바쁜 날일수록 따뜻한 한 잔을 챙겨 나가봐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