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빨간 펜이 필요해서 칼손한테 빌려달라고 했거든.
근데 칼손이 단호하게 거절하더라. 다른 건 다 빌려줘도 빨간 펜은 안 된대.
필통을 봤는데 빨간 펜이 세 자루나 있었어. 그중 하나는 뚜껑에 이름 스티커까지 붙어 있고.
칼손 이건 진짜 안 돼. 미안.
나중에 동아리방에서 물어봤어. 왜 빨간 펜은 안 빌려주냐고.
징크스래. 빨간 펜을 빌려준 날 계좌가 안 좋았대. 두 번이나.
그 뒤로 절대 안 빌려준대. 빨간색을 남한테 주면 운도 같이 나가는 것 같대.
다들 웃었는데 칼손은 진지했어. 웃어도 안 빌려줄 거래.
근데 웃던 애들도 다 하나씩 있더라.
불나방은 왼발부터 신발을 신는대. 오른발부터 신은 날 안 좋았대. 그래서 매일 아침 왼발.
돌부처는 계좌를 볼 때 꼭 앉아서 본대. 서서 본 날 안 좋았대.
다들 자기 거 말하면서 좀 쑥스러워했어.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안 지키면 불안하대.
불나방 왼발 안 지키면 하루 종일 찜찜하다니까.
나는 징크스를 비웃을 생각이 없어. 다들 말이 안 되는 거 알거든.
빨간 펜이랑 계좌가 무슨 상관이야. 칼손도 알아. 근데 지키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건 불안을 손에 쥐는 방법이야. 계좌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근데 빨간 펜은 내가 지킬 수 있어.
뭔가 하나라도 내 손에 있는 게 있으면 덜 불안한 거라니까.
근데 칼손이 한 마디 덧붙이더라. 가끔은 징크스가 무겁대.
빨간 펜을 안 빌려줘서 친구가 서운해할 때. 왼발 신다가 지각할 뻔할 때. 그럴 땐 징크스가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묶는 것 같대.
그 말 듣고 좀 생각했어. 손에 쥔 게 너무 많아지면 손이 무거워지는 거잖아.
돌부처 하나만 지키면 돼.
그날 칼손이 나한테 빨간 펜을 하나 빌려줬어. 이름 스티커 없는 거로. 세 자루 중에 하나는 놔줘도 될 것 같대.
너도 지키는 징크스가 있으면 그거 이상한 거 아니야. 불안을 쥐는 방법이거든. 근데 너무 많아지면 하나씩 놔줘도 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