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못 낸 화를 옆에서 대신 내준 사람이 있었네요. 저는 말리는 시늉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제 손은 무릎에 가만히 있더라고요. 진짜로 말릴 생각이었으면 그러지 않았겠지요.
말로는 됐다고 했는걸요.
그 정도까지 안 해도 된다고요. 그런데 속으로는 조금 더 말해줬으면 싶었어요. 그 마음을 그 자리에서는 인정하지 못했네요.
우리가 삼킨 말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 대신 그것을 꺼내주는 순간에 자기 무게를 드러낸다.
제가 그 자리에서 못 낸 데는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관계가 걸려 있었고 다음에도 볼 사람이었어요. 화를 내면 그다음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접었던 건데 접었다고 없어진 건 아니었던 셈이군요.
그 사람이 화를 내는 걸 보면서 든 마음이 안도였네요.
내가 예민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확인이요. 혼자 참고 있을 때는 이게 화낼 일인지 아닌지도 흐릿해집니다. 옆에서 누가 화를 내주면 그 흐릿한 게 선명해지는걸요.
물론 안도만 온 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제 대신 미움을 받는 자리에 선 거니까요. 저는 편하고 그쪽은 불편해진 셈이군요. 안도와 미안함이 거의 같이 오더라고요.
며칠 지나서 그 사람한테 말했어요.
그날 사실 고마웠다고요. 말리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인정했어요. 그 사람은 알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럴 것 같긴 했습니다.
대신 내준 화가 제 몫을 다 없애주지는 않는걸요.
언젠가는 제가 제 입으로 말해야 할 자리가 오겠지요. 다만 그날 알게 된 게 있네요. 화를 내도 되는 일이었다는 것과, 제 편이 하나 있다는 것이요.
오늘 누가 대신 화를 내줬다면, 그건 나서기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눈에도 그게 보여서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