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 가장자리의 고무 패킹이 자꾸 떨어졌어요. 삼 년 동안 떨어질 때마다 접착제를 사다 다시 붙였지요.
지난주에 또 떨어진 걸 보고는 그냥 떼어서 버렸네요. 그날 밤 문 닫히는 소리가 조금 커졌는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편하게 들리더라고요.
패킹을 다시 붙이는 일이 대단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떨어질 때마다 작게 속이 상했지요. 또 떨어졌네, 이번엔 오래가려나, 하고요. 삼 년 동안 그 작은 실망을 몇 번이나 반복한 셈이군요. 문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요.
예전에는 체념이라는 말이 싫었어요.
포기하는 사람, 지는 사람 같은 느낌이었지요. 끝까지 해보는 게 옳다고 배웠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일은 끝까지 해봐도 같은 자리로 돌아오더라고요. 그걸 몇 번 겪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네요.
바꿀 수 없는 것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만큼의 힘이 돌아온다.
쇼펜하우어는 바라는 마음이 커질수록 괴로움도 커진다고 했지요. 바라는 걸 조금 내려놓으면 그만큼 덜 흔들린다는 얘기였어요. 차갑게 들리지만 제게는 이상하게 따뜻한 말이었어요.
다만 체념이 모든 걸 놓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문을 버린 게 아니라 문을 고치려는 마음만 놓은 거예요. 문은 여전히 잘 닫히고, 조금 시끄러울 뿐이지요. 바꿀 수 있는 걸 놓치는 게 아니라, 못 바꾸는 걸 붙잡던 손만 푼 거고요.
이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가 웃었어요.
자기는 어머니 말버릇을 고쳐보려고 십 년을 애썼대요. 얼마 전에 그만두기로 했더니 오히려 통화가 길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고치려는 마음이 빠지니까 그냥 들을 수 있게 된 거겠지요.
요즘은 밤에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 조금 웃게 돼요.
삼 년 동안 신경 쓰던 소리가 이제는 그냥 우리 집 소리가 됐네요. 싫어하던 걸 받아들이면 그게 풍경이 되는 모양이에요.
체념이 편해졌다고 하면 누군가는 걱정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놓은 건 고칠 수 없는 모서리 하나였어요. 그 모서리를 미워하길 멈추니까 손이 좀 쉬더라고요. 쉰 손으로 다른 걸 조금 더 다정하게 잡을 수 있게 되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