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팀이 바뀌기 전, 마지막으로 큰 발표를 맡게 됐어요. 일주일 내내 준비했지요.
슬라이드를 몇 번이나 고치고 첫 문장은 통째로 외웠어요. 그런데 막상 회의실 앞에 서니 그 첫 문장이 사라졌네요. 삼 초쯤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 삼 초가 정말 길었어요.
다들 저를 보고 있었지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뭘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 손에 쥔 레이저 포인터가 미끄러웠고요. 그때 맨 앞줄 옆자리 동료가 고개를 작게 끄덕여주는 게 보였어요.
그 끄덕임을 보고 나서야 다음 말이 나왔어요.
외운 문장은 아니었지요. 그냥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요, 하고 시작했어요. 조금 서툴렀지만 그 뒤로는 말이 이어지더라고요. 끄덕임 하나가 막힌 길을 뚫어준 셈이었네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말을 막을 때, 고개 하나의 끄덕임이 길을 다시 열어준다.
생각해보면 너무 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완벽한 문장으로, 실수 없이 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문장을 외우는 데만 매달렸어요. 그런데 외운 문장은 하나 끊기면 다 무너지더라고요. 차라리 내용을 이해하고 제 말로 했으면 덜 꼬였을 거예요.
발표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어요.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요. 망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팀장님이 지나가시며 내용 좋았다고 하셨어요. 첫 삼 초는 아무도 기억 못 할 거라고 웃으시더라고요. 그 말에 어깨가 풀렸네요.
동료에게 끄덕여줘서 고마웠다고 했어요.
동료가 놀란 얼굴로 그랬나? 하더라고요. 자기는 그냥 듣고 있었을 뿐이래요. 의식하지 못한 그 작은 동작이 저한테는 그렇게 컸던 거군요.
쇼펜하우어는 무언가를 너무 바랄수록 괴로움이 커진다고 했대요.
발표도 그런 것 같아요. 잘하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말이 나왔으니까 그렇겠지요.
잘하고 싶어서 꼬인 말에도 진심은 다 전해지는 것 같아요.
다음 발표 앞에선 완벽한 문장 대신 끄덕여줄 얼굴 하나를 찾아봐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