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갔더니 엄마가 오래된 상자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사진이 한가득이었어요.
정리하시는 건지 그냥 보시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몇 장을 뒤집어 봤는데 연필로 뭐가 적혀 있었어요.
날짜랑 장소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글씨가 지금 필체와 다르더라고요. 같은 사람이 쓴 건데 몇십 년 사이에 손이 달라진 겁니다. 저는 그게 사진보다 더 오래 봐졌습니다.
사진은 그때의 얼굴을 남기지만, 그 위에 적힌 글씨는 그때의 손을 남긴다.
한 장을 드시면 얘기가 길어집니다.
이건 어디였고 그때 누가 있었고, 하시면서요. 저는 그 얘기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어요. 모르는 사람 이름이 많이 나왔고요. 그래도 그냥 들었습니다.
버릴 걸 고르시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거의 안 버리셨어요.
한 장을 들었다가 다시 상자에 넣으시고, 그다음 장으로 넘어가시고요. 두 시간 동안 상자는 그대로였습니다. 정리가 목적이 아니었던 셈이군요.
돌아오는 길에 그 생각을 좀 했어요.
몇 년 동안 안 꺼내시던 걸 하필 지금 꺼내신 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물어보면 대답을 만드셔야 하니까 그냥 뒀어요.
다만 다음에 가면 또 꺼내실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한 건 옆에 앉아서 들은 것뿐이에요.
사진을 정리해드린 것도 아니고 뭘 해결해드린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돌아올 때 엄마가 오늘 재밌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좀 오래 남았습니다.
다음에 가면 몇 장은 찍어두려고 합니다.
뒤에 적힌 글씨까지 같이요. 언젠가 그 글씨를 못 알아보게 될 때가 오겠지요. 오늘 집에 오래된 상자가 있으시면, 열어보는 저녁을 한 번 만드셔도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