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재생 기록을 열어봤다가 조금 웃었어요. 같은 피아노곡 하나가 하룻저녁에 스물몇 번 찍혀 있더라고요.
일부러 반복을 걸어둔 것도 아니었어요. 끝나면 손이 저절로 다시 누르고 있었네요.
기분이 괜찮은 날에는 새 노래도 곧잘 들어요.
그런데 마음이 흐린 날은 새 곡이 영 귀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처음 듣는 곡은 따라가야 하잖아요. 어디로 갈지 모르는 멜로디를 쫓아갈 힘이 없는 날이 있는 거겠지요.
그래서 이미 아는 곡으로 돌아가요. 다음 소절이 뭔지 아는 곡이요.
아는 곡은 저를 놀라게 하지 않아요.
여기서 올라가고, 여기서 잠깐 쉬고, 여기서 끝난다는 걸 알지요. 하루 종일 예상 못 한 일에 치이다 온 날은 그게 참 고맙더라고요. 적어도 이 몇 분은 제가 다 아는 대로 흘러가니까요.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특별하게 봤다고 하지요.
뭘 바라고 조바심 내는 마음에서 잠깐 풀려나는 순간이 음악을 들을 때 온다는 얘기였어요. 거창하게 들리지만 제 경험으로는 맞는 말 같네요.
좋아하는 곡이 흐르는 동안에는, 잠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된다.
그 곡이 흐르는 동안에는 내일 할 일도, 답 못 한 연락도 멀어지더라고요. 사라지는 건 아니고 잠깐 뒤로 물러나 있는 거지요.
신기한 건 같은 곡인데 매번 똑같지 않다는 거예요.
열 번째쯤에는 왼손 저음이 들렸고, 스무 번째쯤에는 곡 중간에 숨 쉬듯 멈추는 자리가 들렸어요. 처음엔 몰랐던 자리였네요. 반복이 지루한 게 아니라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였군요.
그날도 밖에는 비가 왔어요.
피아노 소리 뒤로 빗소리가 섞여서 들렸는데, 그게 곡의 일부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음량을 조금 줄이고 둘을 같이 들었어요.
같은 곡을 스무 번 넘게 튼 저녁이 헛산 저녁 같진 않아요.
한 곡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었으니까요. 그 몇 분씩을 이어 붙여 하루를 버틴 거겠지요. 오늘 밤도 아마 그 곡을 틀 것 같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