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 마시다 남긴 잔이 세 개 놓여 있습니다. 창가에 하나, 책상에 하나, 싱크대에 하나요.
남은 양이 다 비슷하네요. 거의 절반쯤입니다.
왜 안 마셨나 생각해보니 애초에 마시려고 탄 게 아니더라고요.
뭘 하려고 앉을 때 옆에 뭐가 하나 있으면 시작이 좀 수월해집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손이 갈 데가 생기고 김이 올라오는 걸 잠깐 보게 되고요.
그러니까 마시는 건 부수적인 셈이군요.
어떤 물건은 쓰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곁에 있기 위해 놓인다.
따뜻할 때는 몇 모금 마십니다.
식고 나면 그냥 컵이 됩니다. 마시자니 미지근하고 버리자니 아깝고요. 그래서 그대로 놓여 있게 되는 겁니다. 절반쯤에서 멈추는 건 딱 그 지점이겠지요.
다 마신 잔은 바로 싱크대로 갑니다.
남은 잔은 아직 안 끝난 것 같아서 못 치웁니다. 이따 마실 것처럼 두는 거예요. 물론 안 마시고요. 몇 시간 뒤에 결국 버리게 됩니다.
정리하려고 규칙을 하나 만들어봤어요.
잔은 하나만 씁니다. 다른 방으로 갈 때 들고 가고요. 그러면 새로 타려면 먼저 그 잔을 비워야 하니까 저절로 정리가 됩니다. 규칙이라기보다는 잔이 하나뿐인 상태를 만드는 거지요.
물론 여전히 남깁니다.
다만 세 개가 아니라 하나가 됐어요. 그 정도면 됐다 싶습니다. 다 마시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는 아니었으니까요.
남긴 잔을 보면 게을러 보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그 잔은 제가 앉을 때 옆에 있어줬습니다. 그거면 할 일은 한 셈이지요. 오늘 옆에 반쯤 남은 잔이 있으시면, 다 안 마셨다고 아까워하지는 마셔도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