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에 안개가 짙게 꼈어요. 현관을 나서니 건너편 건물이 반쯤 지워져 있었지요.
늘 지나던 육교를 오르다가 멈췄어요. 육교 끝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서 다리가 허공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거든요. 계단 중간에 서서 한참 봤네요.
안개 낀 날은 멀리가 안 보여요.
평소엔 출근길 내내 저 앞의 신호등, 그 너머의 버스 정류장을 미리 보면서 걷지요. 그런데 그날은 몇 걸음 앞까지만 보였어요. 그 너머는 그냥 하얗게 비어 있었고요.
이상하게 그게 편했어요.
멀리가 안 보이니까 멀리를 걱정할 수도 없었지요. 바로 앞 몇 걸음만 보고 걸으면 됐어요. 평소엔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오늘 할 일을 다 떠올리며 무거워지는데, 그날은 그럴 틈이 없었네요.
멀리가 지워진 날에는, 지금 디딘 걸음만 남는다.
안개 낀 날은 소리도 달라지더라고요.
차 소리가 멀리서 뭉개져 들리고, 사람 발소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멀어지지요. 세상이 솜에 싸인 것 같았어요. 모든 게 조금씩 부드러워진 아침이었군요.
매일 걷는 길인데 처음 걷는 것 같았어요.
익숙한 가게 간판도 안개 속에서 천천히 나타났다 사라졌지요. 늘 보던 것들이 하나씩 나타나는 게 작은 선물 같기도 했고요. 평소엔 한눈에 다 보여서 아무것도 안 보이던 길이었는데 말이에요.
회사에 도착해서도 창밖은 한동안 하얬어요.
동료 하나가 오늘 안개 대단하다고, 아침에 버스가 엄청 천천히 왔다고 하더라고요. 다들 조금씩 늦게 왔는데 아무도 짜증 내지 않았어요. 안개 탓이니까 누구 탓도 아니었지요.
점심 무렵 안개가 걷히고 다시 멀리가 보였어요.
그러자 평소처럼 오후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더라고요. 그래도 아침의 그 느낌이 조금 남아 있었어요. 멀리가 다 보이지 않아도 바로 앞 몇 걸음만 보고 가도 된다는 거요. 하루를 그렇게 걸어도 충분한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