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손이랑 하교하다 보면 꼭 들르는 데가 있어. 학교 앞 문구점.
근데 칼손은 거기서 아무것도 안 사. 그냥 한 바퀴 돌고 나와.
볼펜 코너, 공책 코너, 스티커 코너. 천천히 다 보고 나와. 십 분쯤.
칼손 그냥 보는 거야.
문구점 볼펜 코너에 시필 종이가 있잖아. 펜 써보는 종이.
칼손은 거기에 꼭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 매번 같은 크기로.
내가 몇 번 따라가서 봤는데 종이에 칼손 동그라미가 여러 개 있더라. 날짜 다른 동그라미들.
그게 좀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 문구점에 칼손 흔적이 쌓여 있는 거잖아.
칼손한테 물어봤어. 살 것도 없는데 왜 매일 가냐고.
칼손이 그러더라. 문구점에 있으면 머리가 조용해진대.
예쁜 공책이랑 색색 펜을 보고 있으면 딴생각이 안 난대. 계좌 생각도, 내일 걱정도.
그리고 거기엔 결정할 게 없잖아. 안 사도 되니까. 그냥 보기만 하면 되니까.
불나방 나는 문구점 가면 다 사고 싶어서 못 가.
생각해보면 칼손은 하루 종일 결정하느라 지친 애거든. 먼저 나갈까 말까, 말할까 말까.
근데 문구점에서는 아무것도 결정 안 해도 돼. 보기만 하면 돼.
그게 칼손한테는 쉬는 거였던 거라니까. 결정 없는 십 분.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 건 결정이 아니잖아. 그냥 펜이 굴러가는 거지.
돌부처 동그라미 예쁘게 그리네.
한번은 다 같이 문구점에 갔어. 칼손 따라서.
다들 시필 종이에 하나씩 그렸어. 불나방은 별, 돌부처는 점, 나는 하트.
칼손 동그라미 옆에 우리 그림이 생겼어. 칼손이 그거 보고 웃더라.
그날은 칼손이 볼펜 하나를 샀어. 처음으로. 우리 그림 그린 그 펜으로.
너도 살 것도 없는데 가는 데가 있으면 그건 거기서 쉬는 거야. 시간 낭비 아니거든.
결정 없는 십 분이 필요한 날이 있다니까. 학교 앞 문구점 시필 종이엔 우리 그림이 아직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