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에 작은 화방이 있어요. 점심시간에 가끔 들르지요.
저는 그림을 못 그려요. 학생 때 미술 시간이 제일 어려웠을 정도지요. 그런데도 화방 진열대 앞에 서 있는 게 좋아요. 물감 색을 구경하는 게 좋거든요.
물감마다 이름이 붙어 있어요.
울트라마린, 버밀리언, 번트 시에나 같은 거요. 발음해보면 다 이국적이지요. 색 이름을 하나씩 읽으며 진열대를 따라 걷는 게 작은 여행 같아요. 그림은 못 그려도 색은 볼 수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더라고요.
그날 수채 물감 진열대에서 한 색을 발견했어요.
페인즈 그레이라는 이름의 회색이었지요. 튜브 옆에 칠해진 견본을 보는데 비 오는 날 제 창밖 하늘과 똑같았어요. 푸른 기가 살짝 도는 회색이요. 쓸 줄도 모르면서 그 한 튜브를 샀네요.
쓸 줄 몰라도 마음이 가는 색 하나는, 흐린 날을 조금 다르게 보게 만든다.
계산하는데 사장님이 물으셨어요.
그림 그리세요? 저는 아니라고, 색이 예뻐서 샀다고 했지요. 사장님이 웃으시며 작은 붓 하나를 덤으로 주셨어요. 그냥 종이에 한 번 칠해보라고요. 그 색이 물을 만나면 또 다르게 번진다고 하셨네요.
집에 와서 창가 탁자에 종이를 폈어요.
붓에 물을 묻혀 그 회색을 살짝 풀어 칠해봤지요. 물을 많이 묻힌 데는 옅게, 적게 묻힌 데는 짙게 번졌어요. 그림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얼룩이었어요. 그런데 그 얼룩이 정말 비 오는 하늘 같았어요.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운 걸 바라볼 때 잠깐 마음이 쉰다고 했대요.
꼭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색 하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순간이 오더라고요.
쓸 줄 몰라도 마음이 가는 색 하나쯤 곁에 두면 흐린 날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아요.
가끔은 이유 없이 예쁜 걸 하나 들여봐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