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놓인 가죽 소파는 석 달을 벼르다 들인 거예요. 매장에 두 번 가서 앉아보고, 집에 와서도 사진을 몇 번이나 다시 봤지요.
들어온 날은 괜히 몇 번씩 앉았다 일어났네요.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니까 그냥 앉는 자리가 되어 있더라고요.
돌아보면 소파를 가진 시간보다 바라던 시간이 훨씬 길었어요.
퇴근길에 가구점 앞을 지나며 들여다보고, 자기 전에 치수를 재보고요. 그 석 달 동안은 하루에 한 번씩 작은 기대가 있었던 셈이군요. 막상 들어오고 나니 그 기대가 갈 곳이 없어졌고요.
바라는 것이 채워지면, 바라던 자리가 비어 권태가 들어온다.
쇼펜하우어가 사람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추에 비유했지요. 모자라면 괴롭고, 채워지면 곧 심심해진다는 얘기였어요. 처음 읽었을 때는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소파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제 탓을 했어요.
그렇게 원하던 걸 금방 시시해하다니, 고마운 줄을 모르는 사람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주변에 물어보니 다들 비슷하더라고요. 새 휴대폰도, 이사 간 집도, 오래 기다린 여행도요. 사람 마음이 원래 그렇게 생긴 거겠지요.
곤란한 건 그다음이었어요.
소파가 시시해지자마자 저는 러그를 보고 있더라고요. 소파 밑에 깔 러그요. 바라던 게 채워지면 곧장 다음 바랄 거리를 찾는 셈이네요. 그렇게 가다 보면 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요.
그래도 요즘은 조금 다르게 보고 있어요.
소파가 특별하지 않게 된 건, 이제 이게 제 생활의 일부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더라고요. 들뜬 마음으로 앉던 자리에서 이제는 비 오는 걸 멍하니 봐요. 설렘은 줄었는데 편안함은 늘었군요.
어제는 비가 와서 오후 내내 거기 앉아 있었어요.
창에 물이 흐르는 걸 보고 있으니 러그 생각도 잊었네요. 뭘 더 바라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어요. 그런 시간이 오래가진 않지만, 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좀 쉬어지더라고요.
권태가 오면 뭔가 잘못된 것 같지만, 저는 그냥 바라던 마음이 잠깐 쉬러 간 거라고 여겨보려고요.
또 무언가를 바라게 되겠지요. 그때까지는 이 시시한 소파에 기대 비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