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창가에 앉아 있다가 콘택트렌즈를 뺐어요. 눈이 좀 뻑뻑해서였지요.
비 오는 창밖이 갑자기 달라 보였어요. 가로등과 자동차 불빛이 전부 동그란 빛 덩어리로 번져 있더라고요. 크리스마스 전구 같았네요.
하루 종일 선명하게 보며 살아요.
모니터 속 작은 글씨, 휴대폰 알림, 사람들 표정까지요.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지요. 그러다 보면 저녁엔 눈뿐 아니라 마음까지 지쳐 있더라고요.
렌즈를 빼면 세상이 부드러워져요.
모서리가 다 뭉개지고 색만 남지요. 누가 저를 보는지, 거리에 무슨 간판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알 수 없으니 신경 쓸 것도 없고요. 그게 이상하게 편하네요.
흐릿하게 보는 동안에는, 하나하나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해보면 꼭 다 선명하게 봐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건 흐릿하게 둬도 괜찮지요. 지나간 일의 세세한 장면이나, 남의 표정에 담긴 작은 뜻 같은 거요. 너무 선명하게 보려다 오히려 상처받을 때도 있으니까요.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무언가를 판단하지 않고 그냥 바라볼 때 잠깐 마음이 쉰다고 했대요.
렌즈를 빼고 번진 불빛을 볼 때가 딱 그랬어요. 저게 뭔지, 어디로 가는지 따지지 않고 그냥 빛으로 봤지요. 그 몇 분이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어요.
한참 그렇게 있다가 침대 옆 협탁에 렌즈 통을 올려두었어요.
다음 날 아침 렌즈를 끼니 세상이 다시 선명해졌지요. 창밖도 그냥 거리와 간판으로 돌아갔고요. 조금 아쉬웠지만, 흐릿한 세상에 잠깐 다녀온 덕분에 눈도 마음도 조금 쉬었네요.
모든 걸 선명하게 볼 필요는 없겠지요.
지친 저녁엔 렌즈를 빼고 세상을 잠깐 흐릿하게 둬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