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손 연습장을 빌렸는데 귀퉁이에 뭐가 쓰여 있더라. "내 탓." 세 번.
첫 번째는 크게, 두 번째는 좀 작게, 세 번째는 거의 안 보이게.
글씨가 점점 작아지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어. 소리 내서 말하다가 점점 목소리가 줄어드는 것 같았거든.
칼손 아, 그거 보지 마.
칼손한테 물어봤어. 뭐가 네 탓이냐고.
물린 거래. 자기가 좀 더 기다렸으면, 좀 더 알아봤으면, 다른 애들 말을 들었으면.
그러면서 '했으면'을 계속 붙이더라. 다섯 개쯤.
듣다 보니까 그 '했으면'이 다 지나간 일이잖아. 지금은 아무것도 못 바꾸는 거.
그 얘기에 불나방이 끼어들었어. 자기도 그런 적 있대.
근데 불나방은 반대래. 처음엔 남 탓을 했대. 뉴스 탓, 친구 탓. 근데 결국 밤에 혼자 있으면 자기 탓이 된대.
돌부처는 아무 말 안 하다가 한 마디 했어.
돌부처 탓하면 덜 무서워.
그 말이 좀 이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맞더라.
누구 탓이라도 하면 이유가 생기잖아. 이유가 있으면 다음엔 피할 수 있을 것 같고.
근데 그냥 운이 나빴다고 하면 다음에도 또 그럴 수 있다는 거니까 더 무서운 거야.
그러니까 칼손이 자기 탓을 하는 건 무서움을 줄이려고 그러는 거더라. 자기를 벌주면서 마음을 붙잡는 거라니까.
나는 그게 좀 아팠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래서 칼손 연습장에 내가 하나 더 썼어. 세 번째 "내 탓" 옆에. "그냥 물린 거."
글씨는 크게 썼어. 칼손 첫 번째 글씨보다 더 크게.
칼손이 그걸 보더니 한참 있다가 웃더라. 지우지는 않았어. 지금도 그 연습장에 있대.
불나방 나도 하나 써줄까?
너도 지금 '했으면'을 계속 붙이고 있으면 거기서 잠깐 멈춰. 지나간 건 못 바꾸잖아.
물린 건 네 잘못이 아니라 그냥 물린 거야. 동아리방에서는 그 말을 크게 써준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