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에 팀장님과 평가 면담이 잡혔어요. 그 전에 자기 평가 양식을 채워야 했지요.
성과를 적는 칸 앞에서 한참 멈췄어요. 겨우 세 줄을 썼네요. 그 밑에 연필로 작게 그리고 버텼다, 라고 적었다가 지웠어요.
그 세 줄을 보니 조금 허탈했어요.
일 년 동안 정말 바쁘게 지냈거든요. 야근도 많았고,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주말에 노트북을 연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양식에 맞춰 적으니 세 줄이 전부였어요. 눈에 보이는 성과만 남고 나머지는 다 빠진 거예요.
평가는 결국 몇 개의 숫자로 정리되지요.
그 숫자가 제 일 년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져요. 버틴 날들, 동료를 도와준 오후, 실수를 수습하느라 늦게까지 남았던 밤은 숫자에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그걸 생각하니 조금 쓸쓸했네요.
평가표의 칸은 좁고, 내가 지나온 일 년은 그보다 훨씬 넓다.
연필로 적었다가 지운 그 말이 제일 솔직한 문장이었어요.
이번 한 해 가장 잘한 일은 버틴 거였지요. 그만두고 싶었던 날도 있었고, 다 놓고 싶은 밤도 있었어요. 그래도 매일 아침 출근했어요. 그건 평가표에 적을 수 없는 성과였어요.
쇼펜하우어는 남이 매기는 평판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대요.
평가 점수는 회사가 보는 저의 한 조각이겠지요. 저 전체는 아니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숫자가 조금 덜 무섭게 느껴졌어요.
면담 날 팀장님이 세 줄을 보시고 웃으셨어요.
생각보다 겸손하게 썼다고요. 그러고는 제가 적지 않은 일들을 먼저 말씀하셨지요. 그때 다른 팀 일까지 도와준 거, 신입 후배 챙긴 거요. 팀장님은 칸 밖의 일도 보고 계셨던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어깨가 조금 내려갔네요.
평가표에 다 들어가지 않는 하루들도 분명 내가 해낸 시간이겠지요.
면담이 끝나면 그 칸 밖의 날들도 스스로 인정해줘도 괜찮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