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걱정해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대답에 짜증이 섞여 나갔어요.
말하고 나니까 그 사람 목소리가 작아지더라고요. 그게 며칠 걸렸습니다.
그 말은 저를 위해서 한 말이에요.
그걸 모르는 게 아닙니다. 알면서도 뻗쳤어요. 알고 있다는 게 오히려 더 미안한 대목이지요.
우리는 낯선 사람의 무례보다 가까운 사람의 걱정에 더 자주 발끈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듣기 때문이다.
왜 짜증이 났나 보니 이쪽이더라고요.
그 걱정의 내용은 제가 이미 며칠씩 생각한 것들입니다.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못 하고 있는 거고요. 그런데 밖에서 말로 들으면 그게 안 하고 있는 사람한테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또 하나는 걱정의 모양입니다.
걱정하는 말에는 대개 이렇게 해보라는 게 붙어요. 그러면 듣는 쪽은 지금이 잘못됐다는 말로 받습니다. 말한 사람은 그런 뜻이 아니었겠지만 도착할 때는 그렇게 도착하는걸요.
며칠 뒤에 그쪽 입장에서도 생각해봤어요.
옆에서 보고 있는데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도 어렵지요.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말밖에 없는 겁니다. 저도 다른 자리에서는 그 역할을 하고 있고요.
그래서 요즘은 삼키지 않고 말해봅니다.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그 말은 좀 무겁다고요. 처음엔 이 말도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짜증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상대도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를 알게 되고요.
고마움과 짜증이 같이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하나를 지워야 하는 게 아닌걸요. 오늘 걱정해주는 말에 뻗치셨다면, 그건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 붙들고 계셨기 때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