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내가 물러서겠다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도록 그 일을 혼자 세고 계시더군요.
세고 있다는 것 자체가 표식입니다. 양보는 세지 않습니다.
양보와 포기는 결과가 비슷합니다.
내가 가지려던 것을 안 갖습니다. 상대가 가져가거나 아무도 안 갖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구별이 안 되죠. 그러면 무엇으로 갈릴까요?
돌려받을 것이 남아 있느냐입니다.
양보는 이번에 내가 안 갖는 것입니다. 다음이 있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이번엔 네가 해라, 다음엔 내가 한다. 그래서 양보에는 상대가 있고 관계가 있습니다. 주고받는 셈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지요.
양보한 사람이 안 세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셈이 끝나지 않았으니 굳이 지금 정산할 필요가 없거든요.
포기는 이것을 앞으로도 안 갖기로 정하는 일입니다.
다음이 없습니다. 상대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 항목을 목록에서 지우는 것입니다.
포기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워야 할 것은 지워야 합니다. 다만 포기를 양보라고 부르면 문제가 생깁니다.
포기해놓고 양보라고 부르면 마음이 다음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는데 안 옵니다. 상대는 그게 양보였다는 걸 모르니까요. 애초에 다음이 없는 일이었고요. 그러면 기다린 만큼 억울함이 쌓입니다. 석 달을 세고 계셨다면 그 자리에 계신 것이겠지요.
반대로 양보인데 포기라고 부르면 서운함이 먼저 옵니다. 아직 돌려받을 자리가 있는데 없는 줄 알고 닫아버리는 겁니다.
물러서기 전에, 혹은 지금이라도 이렇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돌려받을 자리가 있다면 그 말을 상대에게 했느냐입니다. 속으로만 정한 양보는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습니다.
양보 쪽이면 할 일은 말로 꺼내는 것입니다. 이번엔 제가 하겠고 다음엔 부탁드린다고요. 그 한 줄이 있어야 셈이 이어집니다.
포기 쪽이면 할 일은 세는 걸 멈추는 것입니다. 지운 항목을 계속 세면 지운 게 아니니까요. 포기라고 정확히 부르는 순간부터 그 무게가 줄어듭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물러선 것은 같습니다. 돌려받을 자리가 남았는지만 보시죠.
구분이 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