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하나가 책을 한 아름 쌓아 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휴대폰은 뒤집혀 있었죠. 조별 과제 자료를 혼자 찾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단톡방은 조용하고, 자기만 이러고 있는 것 같다고요. 알림을 꺼 버렸다며 한숨을 쉬더군요.
제 노력은 다 보입니다. 제가 들인 시간과 수고는 제가 다 알죠. 그런데 남의 노력은 결과만 보이거나 아예 안 보입니다. 기준이 다릅니다. 저에게 "충분히"는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일 수 있더군요.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일을 떠안습니다. 한 번 나서면 그다음부터 당연히 그 사람 일이 되곤 하죠. 말하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면 불평처럼 들릴까 봐 혼자 삼키게 됩니다.
서운함이 쌓입니다. 앞서 애쓴 만큼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다룬 글이 있는데, 그 서운함이 함께하는 사람들을 향하게 되죠.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사라집니다. 혼자 다 해 버리면 다른 사람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지칩니다. 그리고 지친 사람은 결국 일을 놓게 되더군요.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너무 많은 짐을 기꺼이 지는 낙타를 이야기합니다. 앞서 낙타 사자 아이를 적었는데, 낙타는 성실하지만 그 짐이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죠.
그리고 그 낙타는 언젠가 사자가 되어 "나는 원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함께하는 일에서라면, 그건 "이건 같이 하자"고 말하는 일일 겁니다.
모든 짐을 혼자 지는 자는 성실한 것이 아니라 외로운 것이다. 짐을 나누자고 말하는 입이 함께 가는 길을 연다.
일을 쪼개서 나누자고 말하십시오. "나만 하잖아"가 아니라 "이 부분 맡아 줄 수 있어?"로요. 제 기준을 말로 하십시오. 어디까지 하면 충분한지 미리 맞추면 서운함이 줄어듭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찾아보십시오. 안 보였을 뿐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은 손을 놓아 보십시오. 제가 하지 않아도 일이 굴러가는지, 누군가 나서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폐관 무렵 그 학생이 휴대폰을 다시 뒤집어 보더니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조원 한 명이 자료를 정리해서 올렸다고요. 다들 바빴을 뿐 손을 놓은 건 아니었던 거죠. 그 학생은 나가며 단톡방에 역할을 나누자는 말을 올리겠다고 하더군요.
혼자 애쓰는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짐을 혼자 끌어안는 대신, 나누자고 먼저 말하는 쪽으로 함께 가는 길을 만들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