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이에서 버스표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43쪽이었어요. 거기서 멈춘 사람이 있었던 거죠.
그 표를 그대로 두고 다시 꽂아뒀습니다. 누군가 43쪽까지 갔다는 사실이 지워질 이유는 없더군요.
중간에 덮으면 의지가 약한 것 같죠. 그런데 안 넘어가는 책은 대개 지금의 나와 어긋나 있습니다.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질문이 달라서요.
지금 필요한 게 위로인데 책이 계속 따지고 들면 손이 안 갑니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 안 맞는 겁니다.
몇 년 뒤에 같은 책을 빌려 가서 단숨에 읽고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책이 쉬워진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달라진 거거든요.
읽히는 시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안 넘어가는 책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리만 옮겨두면 되죠.
덮은 책이 마음에 걸리는 진짜 이유는 책이 아니라 나에 대한 판정 때문일 때가 많아요. 나는 끈기가 없다는 문장을 그 책에 붙여둔 겁니다. 붙여두면 다음 책을 펼 때도 그 문장이 따라옵니다.
때가 오지 않은 것을 억지로 쥐는 손은, 정작 때가 왔을 때 비어 있지 않다.
끝까지 읽는 습관은 학교에서 배운 것에 가깝습니다. 검사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다 읽었느냐가 성실함의 증거였죠.
지금은 검사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 규칙을 지고 있어요. 지고 있으면 책을 펴는 일 자체가 부담이 됩니다.
서가를 정리하다 보면 유독 손을 많이 탄 책과 아무도 안 건드린 책이 갈립니다. 그런데 손을 많이 탄 책일수록 뒤쪽은 깨끗해요. 다들 앞부분에서 멈춘 겁니다. 그 사실이 저는 이상하게 위안이 되더군요.
그만둔 책이 마음에 걸린다면 한 가지만 정해두세요. 버릴지, 자리를 옮길지, 아니면 나중에 다시 볼지요.
정해두지 않으면 계속 걸립니다. 정해두면 그 책은 실패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미뤄둔 약속이 되죠. 무엇을 지금 읽고 무엇을 미룰지는 결국 제가 정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