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같은 열람석에 앉으시는 손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자리에 앉으시더니 한참 책상 위를 매만지시더군요. 늘 두던 펜 꽂이의 자리가 조금 바뀌어 있었던 거죠. 제자리로 돌려놓고 나서야 책을 펴셨습니다. 나중에 웃으며 말씀하셨죠. 별것 아닌데 괜히 신경 쓰여서요.
물건은 저의 연장입니다. 오래 쓴 물건에는 제 손때와 습관이 배어 있죠. 그걸 남이 만지면 제 일부를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리가 정해져 있어야 편합니다. 물건이 늘 같은 자리에 있으면 머릿속이 정돈된 느낌이 들더군요. 허락 없이가 문제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미리 물어봤다면 괜찮았겠죠. 경계를 넘었다는 느낌이 불편한 거죠. 쉴 자리가 흔들립니다. 제 공간이 흐트러지면 마음도 쉴 곳을 잃은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을 두고 "예민하다", "까다롭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물건과 자리를 아끼는 건 자기 경계를 아는 일이기도 하죠. 앞서 쉽게 상처받는 성격을 적으며 예민함은 섬세함의 다른 얼굴이라고 했는데, 이 마음도 그렇습니다.
니체는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앞서 니체 우정론과 남을 쉽게 믿는 성격을 적으며 그 이야기를 했죠. 너무 가까워 경계가 사라진 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지치게 한다고요.
제 물건과 자리는 그 거리를 지키는 작은 울타리일지도 모릅니다.
울타리 없는 정원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작은 울타리를 아는 자가 남의 정원도 아낄 줄 안다.
미리 말해 두십시오. "내 책상은 그대로 두면 좋겠어." 상대는 몰라서 만졌을 가능성이 크죠. 정말 중요한 것만 지키십시오. 모든 물건을 다 지키려 하면 저도 지칩니다. 꼭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 몇 개만요. 함께 쓰는 공간은 따로 생각하십시오. 도서관 열람석처럼 모두의 자리라면, 제 물건을 두고 가지 않는 게 서로 편합니다. 앞서 자리 맡아두면 안 되는 이유를 적었죠. 남의 물건도 그만큼 아끼십시오. 제 경계를 아는 사람은 남의 경계도 알아봅니다.
그 손님은 그날 이후로 펜 꽂이를 가방에 넣어 가셨습니다. 여긴 모두의 자리니까요, 하시면서요. 그 대신 집 책상은 가족에게 그대로 두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시더군요. 가족이 순순히 들어줬다고 웃으셨습니다.
제 자리를 아끼는 마음은 앞으로도 그대로일 겁니다. 저는 그 마음을 까다로움으로 숨기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 제 울타리를 세우며 남의 울타리도 함께 아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