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 서가를 통째로 훑으시고는 제일 두꺼운 책을 뽑아 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두 주 뒤에 그대로 반납되더군요.
가장 제대로 된 걸 고르셨는데 그게 시작하기에는 가장 나쁜 선택이었습니다. 순서가 있어서 적어두죠.
새 분야에 들어갈 때 저는 이 순서를 권하죠.
첫 권 — 가장 얇고 쉬운 것. 입문서나 청소년용도 좋습니다. 목적은 지식이 아니라 그 분야의 낱말을 익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무엇이라 부르는지만 알면 그다음이 훨씬 빨라지죠.
둘째 권 — 그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는 개론서. 여기서 전체 구조가 잡힙니다. 첫 권에서 익힌 낱말이 있으니 읽힙니다.
셋째 권 — 내가 궁금한 한 대목만 깊이 다룬 책. 둘째 권을 읽고 나면 어디가 궁금한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때 고르시면 됩니다.
제대로 하고 싶어서 두꺼운 책부터 잡으시는 마음을 알죠. 저도 그럽니다.
그런데 두꺼운 개론서는 이미 낱말을 아는 사람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모르는 용어가 한 쪽에 예닐곱 개 나오면 그 책은 안 읽히죠. 실력 문제가 아니라 순서 문제죠.
그리고 앞에서 적었듯 두께 자체가 시작을 막습니다. 두 주 뒤에 그대로 돌아오는 이유가 그겁니다.
가장 얇고 쉬운 책은 어떻게 찾느냐고 물으시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어린이나 청소년 자료실을 한 번 보십시오. 부끄러울 것 없습니다. 그 분야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맞춰 쓴 책이 거기 있고, 어른이 읽어도 뼈대는 같죠. 저도 낯선 분야는 거기서 시작합니다.
시리즈로 나온 입문서도 좋습니다. 분량이 정해져 있어 끝이 보이거든요.
앞에서 읽는 속도 얘기를 하면서도 적었지만, 속도를 만드는 건 기술이 아니라 배경 지식입니다.
첫 권을 읽고 둘째 권을 읽으면 둘째 권이 훨씬 빨리 읽히죠. 그리고 셋째 권은 더 빠르죠. 세 권째쯤 되면 그 분야 글이 갑자기 편해지는 지점이 옵니다. 거기까지 가는 게 목표입니다.
처음 오르는 산에서는 정상보다 길머리를 찾는 데 시간이 더 든다.
세 권을 지나면 그다음에 뭘 읽을지는 안 물어보셔도 됩니다. 셋째 권의 참고문헌이 알려주거든요.
두꺼운 책을 그대로 반납하셨던 그분께 저는 얇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다음에 그 두꺼운 책을 다시 빌려 가셨고, 이번에는 다 읽으셨습니다.
같은 책인데 순서만 바뀐 것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