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에 밑줄이 있어 못 읽겠다며 바꿔 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거슬린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남의 밑줄이 있으면 읽기 전에 답을 보는 것처럼 됩니다.
내가 어디서 멈출지 정하기 전에 누가 먼저 여기가 중요하다고 표시해둔 셈이죠. 그러면 시선이 거기로 끌려갑니다. 앞서 서평을 먼저 보고 읽을 때를 적었는데 같은 자리고요.
그리고 그 사람의 읽기가 내 읽기를 덮습니다. 특히 밑줄이 촘촘하면 더 그렇죠.
한쪽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 자국이 쓸모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책에서는 길잡이가 됩니다. 앞서 철학책 읽는 순서를 적었는데, 먼저 읽은 사람이 어디서 걸렸는지가 보이면 덜 막막하죠. 메모가 있으면 대화가 됩니다. 여백에 적힌 반박이나 물음표가 재미있을 때가 있습니다. 혼자 읽는 게 아니게 되거든요. 오래된 책은 그 자체가 기록입니다. 앞서 도서관이 동네 기록을 모으는 이유를 적었는데, 삼십 년 전 사람의 밑줄도 한 종류의 기록이죠.
지우실 수 있습니다. 연필은 지우개로 지워집니다. 볼펜은 못 지우고요. 헌책을 고르실 때 이걸 먼저 보시면 됩니다.
표시가 심하면 다른 판을 찾으십시오. 헌책은 대개 여러 권이 나와 있습니다. 상태 표기에 필기 있음이라고 적힌 걸 거르시면 되죠.
도서관 책이면 그냥 알려주십시오. 이용자가 그어놓은 건 우리가 지웁니다. 지워지지 않으면 바꾸고요. 그냥 참고 읽으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반대쪽 얘기입니다.
내 책에는 마음껏 그으십시오. 다만 나중에 팔거나 물려주실 생각이면 연필로요. 앞서 밑줄을 그을지 망설여질 때를 적었는데, 연필이면 그 망설임이 대부분 없어집니다.
도서관 책에는 안 됩니다. 다음 사람 읽기를 덮는 일이 되니까요. 대신 쪽수를 따로 적어두시면 됩니다.
남의 밑줄이 거슬리는 것은, 읽기가 원래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여백에 메모가 많은 헌책을 하나 구하셨다고 하시더군요.
그 책은 안 거슬리셨답니다. 밑줄은 답을 알려주고 메모는 묻고 있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