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신청서를 만년필로 쓰시던 손님이 계셨습니다. 좋은 펜이네요, 하고 말씀드리자 웃으셨죠. 몇 달을 망설이다 샀는데, 사 놓고 일주일을 후회했다고요. 이런 걸 나한테 써도 되나 싶어서요.
남을 먼저 챙기는 데 익숙합니다. 가족 선물, 친구 생일엔 망설이지 않는데 제 것만 오래 고민하죠. 꼭 필요한 것만 사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필요 없는 걸 사면 낭비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저를 위한 지출이 이기적인 것 같습니다. 앞서 나답게 살라는 말이 이기적으로 들리는 마음을 다룬 글이 있는데, 그 마음과 닮아 있죠.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낍니다. 앞서 축하받는 게 어색한 성격을 적었는데, 제게 주는 선물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기쁨이 사라집니다. 하루를 버티게 하는 작은 즐거움들이 다 "나중에"로 밀리죠. 지칩니다. 남에게만 주는 사람은 언젠가 마릅니다. 남에게 주는 것도 무거워집니다. 제 잔이 비면 나눌 것도 없으니까요.
앞서 베푸는 덕을 적었습니다. 니체는 베푸는 사람을 넘치는 잔에 빗댔죠. 그리고 넘치려면 먼저 제 잔을 채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를 위해 작은 것 하나를 마련하는 일도 그 잔을 채우는 일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이기심이 아니라, 오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일이죠.
제 잔을 비워 둔 채 남의 잔만 채우는 손은 곧 떨린다. 제 잔을 채운 자의 손만이 오래 따를 수 있다.
작은 것부터 허락하십시오. 큰돈이 아니라 커피 한 잔, 책 한 권 같은 것부터요. 남에게 선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이걸 산다고 하면 뭐라고 할지 떠올리는 겁니다. 아마 "잘했다"고 하겠죠. 오래 쓸 것을 고르십시오. 그 만년필처럼, 매일 손에 닿는 물건은 미안함보다 기쁨이 오래 남습니다.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너그러움이 빚이 되면 그건 또 다른 짐이니까요.
그 손님은 그 뒤로도 대출 신청서를 늘 그 펜으로 쓰셨습니다. 이제는 후회 안 한다고요.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그게 그 값을 하고도 남는다고 하시더군요.
저를 위해 쓰는 일은 여전히 망설여질 겁니다. 그래도 저는 제 잔을 먼저 채우는 일도 나눔의 일부라는 걸 기억하며, 제게도 작은 선물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