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첫날, 자기소개 차례가 된 손님이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책 읽는 척만 하는 사람이에요. 분위기를 풀려던 말이었죠.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았습니다. 손님 얼굴이 잠깐 굳더군요. 끝나고 나가시며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또 그랬네.
먼저 깎으면 덜 아픕니다. 남이 지적하기 전에 제가 먼저 말해 버리면, 상처가 덜할 것 같죠. 분위기를 풀고 싶습니다. 어색한 자리에서 저를 낮추면 사람들이 편해질 거라고 여깁니다. 겸손해 보이고 싶습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반대쪽으로 기울죠. 익숙해졌습니다. 한두 번 웃음이 터진 경험이 있으면, 그게 제 역할처럼 굳어 버리더군요.
가볍게 던진 말이지만, 반복되면 몇 가지가 남습니다.
남들이 그 말을 믿게 됩니다. 농담이었는데 어느새 저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죠. 제가 그 말을 믿게 됩니다. 이게 더 무섭습니다. 여러 번 말한 문장은 제 안에서 사실처럼 자리를 잡으니까요. 듣는 사람이 곤란해집니다. 그날 아무도 웃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웃으면 동의하는 것 같고, 안 웃으면 어색하니까요.
앞서 나에게만 엄격한 성격을 적었는데, 깎는 농담은 그 엄격함이 웃음의 옷을 입은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니체는 웃음을 아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더 높은 인간들에게 웃음을 배우라고 당부하죠. 앞서 그 대목을 적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웃음은 저를 깎는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넘어서는 웃음, 제 위에 서서 웃는 웃음이었죠.
너를 깎아 얻은 웃음은 빌린 웃음이다. 너를 딛고 서서 웃어라. 그 웃음은 네 것이다.
상황을 웃기십시오, 저 말고. 어색함 자체를 말해 버리는 겁니다. "첫날이라 다들 긴장하셨죠" 같은 식으로요. 사실만 말하고 멈추십시오. "책을 좋아하는데 끝까지 못 읽는 책이 많아요." 깎지 않아도 솔직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참아 보십시오. 깎는 말이 입까지 올라왔을 때 한 박자만 쉬면, 다른 말이 나올 자리가 생기죠.
다음 모임에서 그 손님은 이렇게 소개하셨다고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데,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고요. 이번엔 몇몇 분이 고개를 끄덕이셨다고 하더군요.
저를 깎는 말은 쉽게 나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말이 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도록, 깎지 않고도 웃을 수 있는 말을 하나씩 제 것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