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한 쪽을 찍어 화면에 띄우고, 그 옆에 종이를 놓고 손으로 옮겨 적으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번역기가 뱉은 문장을 다시 다듬고 계셨죠. 이런 자리를 요즘 자주 봅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원서 서가는 거의 비어 있었거든요.
물어보면 대답이 대체로 비슷합니다.
번역본이 안 나온 책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분이 계시고, 번역본이 있는데 오래돼서 원서를 보신다는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번역기가 있으니 한번 해볼 만해졌다는 말씀이 빠지지 않더군요.
예전에는 사전을 한 낱말씩 찾아야 해서 한 쪽에 한 시간이 들었죠. 지금은 그 벽이 낮아진 겁니다.
이 변화가 실제로 여는 것이 있습니다.
번역되지 않은 책에 닿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안 나온 분야가 아직 많죠. 특히 전문 분야는 번역을 기다리다 몇 해가 갑니다.
번역본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읽히는 대목을 원문과 맞춰보면 번역 문제인지 원래 그런 글인지가 갈립니다. 예전에는 그걸 확인할 방법이 사실상 없었죠.
시작하는 문턱이 낮아졌습니다. 완벽히 못 읽어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한쪽만 말씀드리는 건 공정하지 않겠죠.
틀려도 모릅니다. 기계가 매끄러운 문장을 내놓으면 그게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원문을 못 읽으니 번역기를 검증할 수도 없죠. 이게 가장 큰 위험입니다.
문장의 결이 사라집니다. 저자가 고른 낱말, 일부러 어긋나게 쓴 문장, 반복해서 쓰는 표현이 기계를 지나면 대체로 평평해집니다. 내용은 남고 목소리는 빠지죠.
실력이 잘 안 늡니다. 매번 돌려서 읽으면 그 언어로 읽는 힘은 그대로입니다.
말리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순서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원문을 한 번 읽으십시오. 대충이라도 눈으로 지나간 다음에 돌리시면, 기계가 이상하게 뱉었을 때 그게 보입니다. 바로 돌려버리면 그 감각이 안 생기죠.
중요한 대목은 두 번 확인하십시오. 인용하시거나 근거로 쓰실 문장은 다른 번역기로 한 번 더 돌려보시면 됩니다. 두 결과가 크게 다르면 그 자리는 조심하셔야 하는 자리입니다.
도구는 문을 열어줄 뿐이다. 그 안을 걷는 일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원서를 찾으시는 분이 늘어서 저희도 바뀐 게 있습니다.
원서와 번역서를 같이 갖추려고 하고, 어떤 번역본이 있는지 물으시면 확인해드립니다. 번역본이 이미 나와 있는데 모르고 원서와 씨름하시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거든요. 그건 물어보시면 오 분에 끝납니다.
손으로 옮겨 적으시던 그분은 나중에 그 책의 번역본이 있다는 걸 아셨습니다. 조금 허탈해하시더군요.
그래도 그동안 읽으신 대목은 남아 있습니다. 다만 다음번에는 먼저 물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