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라 지원서를 걷었는데 열두 장이 들어왔다. 다 읽어봤는데 좀 웃겼다.
"미리 알아두고 싶어서요." 이 문장이 아홉 장에 그대로 있었다.
나머지 세 장도 비슷했다. 표현만 조금 달랐지 결국 같은 말이거든. 미리 알아두고 싶다, 나중에 필요할 것 같다, 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것 같다.
이걸 보고 애들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근데 나는 좀 다르게 봤다. 다들 진짜 이유는 안 쓴 거지.
지원서에 쓸 수 있는 이유랑 실제 이유는 원래 다르거든.
두 번째를 적으면 안 뽑힐 것 같잖아. 그래서 다들 첫 번째를 적는 거다. 나도 처음 들어올 때 그랬거든.
근데 웃긴 건, 우리 방에 오래 남는 애들은 대부분 두 번째 이유로 온 애들이더라. 첫 번째로 온 애들은 한 달쯤 나오다가 조용히 안 나온다니까.
지원서 이유는 이제 안 물어본다. 어차피 다 같은 말이 나오니까.
대신 하나만 물어본다. "여기 오면 뭐 하고 싶냐"가 아니라 "여기 말고 어디 갈 생각이었냐"를 물어본다. 이건 준비한 답이 없거든.
그러면 진짜가 좀 나온다. 어떤 애는 딴 데도 넣었다고 하고, 어떤 애는 여기밖에 안 넣었다고 한다. 여기밖에 안 넣은 애가 오래 남더라.
지금 방에 붙어 있는 셋도 지원서는 똑같이 썼다.
불나방 나는 그때 뭐 적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니까.
돌부처 나는 형이 여기 있었어서 왔다.
칼손 나는 딴 데 떨어져서 온 건데 그건 안 적었거든.
셋 다 지원서에는 미리 알아두고 싶다고 썼다. 근데 실제 이유는 저거였던 거다. 그리고 셋 다 아직 나온다.
이 얘기를 왜 적어두냐면, 이유가 별거 아니어서 스스로 좀 부끄러워하는 애들이 있어서 그렇다.
친구 따라와서, 갈 데가 없어서 왔다는 게 뭐 어떻냐. 시작하는 이유랑 계속하는 이유는 원래 다른 거거든. 계속 나오다 보면 이유가 나중에 생기더라.
나도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다. 지금은 여기 애들 표정 보는 게 좋아서 나온다. 그건 지원서 쓸 때는 몰랐던 이유다.
야, 너도 뭐 지원서 같은 거 써본 적 있냐. 거기 적은 거 말고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을 거다. 그거 부끄러워할 거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