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권을 빌려 가시면서 스스로 물으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러면 하나도 못 읽는 거 아니냐고요.
한 권씩 끝내야 한다는 규칙을 어디선가 배우신 거죠. 저는 그 규칙이 늘 맞지는 않다고 봅니다.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게 집중력의 증거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책마다 읽히는 조건이 다릅니다.
머리가 맑을 때만 들어가는 책이 있고, 지쳤을 때 겨우 넘어가는 책이 있죠. 한 권만 들고 있으면 그 책이 안 맞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못 읽습니다.
여러 권이 있으면 그 시간에 맞는 걸 집으면 되고요.
다만 아무 조합이나 되는 건 아닙니다. 결이 겹치면 섞입니다.
안 되는 쪽은 비슷한 책 여러 권입니다. 같은 분야의 개론서 두 권을 같이 읽으면 어느 책에서 본 건지 헷갈립니다. 소설 두 편도 인물이 섞이죠.
되는 쪽은 결이 다른 조합입니다.
세 권을 넘기면 저는 잘 안 되더군요. 두세 권이 적당한 것 같습니다.
앞서 읽을 시간 얘기에서도 적었는데, 자리를 나누면 훨씬 쉽습니다.
머리맡에는 잠들기 전 볼 책, 가방에는 오가며 볼 책, 책상에는 집중해서 볼 책. 책이 자리를 갖고 있으면 그 자리에 앉을 때 무엇을 읽을지 안 고르게 됩니다.
고르는 데 힘이 들면 그때부터 안 읽게 되거든요.
여러 권을 오가면 돌아왔을 때 앞이 기억 안 납니다. 이게 병행의 유일한 실제 비용이죠.
그래서 저는 덮을 때 갈피에 한 줄을 적습니다. 여기까지 무슨 얘기였는지요. 두 줄이면 길고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다음에 펼 때 그 한 줄만 보면 바로 이어집니다.
여러 갈래를 동시에 걷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력이 아니라 표시다.
한 가지는 갈라두겠습니다.
여러 권을 같이 읽는 것과 여러 권을 펼쳐만 두는 것은 다릅니다. 앞쪽은 방식이고 뒤쪽은 미룸이죠. 갈피가 몇 주째 같은 자리에 있으면 그건 병행이 아니라 멈춘 겁니다.
그럴 때는 한 권만 남기고 나머지는 반납하시는 게 낫습니다. 손에 든 게 적어야 그중 하나가 끝납니다.
네 권을 빌려 가셨던 그분은 두 권을 다 읽고 두 권을 그대로 반납하셨습니다. 저는 그 정도면 잘된 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