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수첩 첫 장 앞에서 한참 펜을 들고만 계신 손님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정해 준 인생 계획표를 이제 따르지 않기로 했다고요. 그런데 막상 제 계획을 쓰려니 첫 줄이 안 나온다고 하시더군요.
그 모습이 『차라투스트라』의 한 장면과 꼭 닮아 있더군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에서 가장 긴 장이죠. 이렇게 시작하죠.
나는 여기 앉아 기다린다. 내 주위에는 깨진 낡은 서판들과 반쯤 쓰인 새 서판들이 놓여 있다.
서판은 옛날 사람들이 법과 가치를 새겨 두던 돌판입니다. 낡은 서판은 물려받은 가치, 새 서판은 새로 세울 가치를 뜻하죠. 차라투스트라는 그 사이에 앉아 있습니다. 낡은 것은 깨졌는데 새것은 아직 반만 쓰인 채로요.
앞서 망치로 철학한다는 뜻과 낙타 사자 아이를 적었습니다. 사자는 낡은 가치를 깨뜨리지만 새 가치를 만들지는 못한다고 했죠.
이 장이 보여 주는 것도 같습니다. 낡은 서판을 깨는 건 시작일 뿐이고, 진짜 어려운 일은 새 서판에 무엇을 쓸지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기다리며 앉아 있죠. 서두르지 않고, 반쯤 쓴 서판을 곁에 두고요.
이 장에는 차라투스트라가 새 서판에 쓰려는 말들이 하나씩 나옵니다. 앞서 니체 웃음 뜻을 적으며 빌린 문장, 한 번도 춤추지 않은 날은 잃어버린 날로 여기자도 여기 있죠.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사람은 넘어서야 할 무엇이라고요. 앞서 위버멘쉬 뜻을 적었는데, 새 서판의 첫머리에 놓인 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깨진 돌판 앞에서 울지 마라. 그 자리는 네가 새 글자를 새길 빈 돌이 놓일 자리다.
물려받은 규칙 하나를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걸 지금도 따르고 싶은지 물어보는 겁니다. 깬 자리를 서둘러 채우지 마십시오. 반쯤 쓰인 서판으로 한동안 지내도 괜찮습니다. 새 서판엔 한 줄부터 쓰십시오. 인생 전체가 아니라 이번 달의 원칙 하나요.
그 손님께 이 장의 첫 문장을 보여 드렸습니다. 반쯤 쓰인 서판이라는 말에 웃으시더군요. 그날 수첩 첫 장에 딱 한 줄을 쓰고 가셨습니다. 무엇이었는지는 여쭙지 않았죠.
낡은 서판을 내려놓는 날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저는 깨진 조각 앞에서 머뭇거리더라도, 새 서판에 제 손으로 한 줄씩 새겨 가며 제 가치를 다시 세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