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엔 왜 편지가 없냐는 얘기를 전에 적었어. 고수들은 전음으로 멀리서도 말을 보내니까 종이가 필요 없다고.
근데 무협 읽다 보면 편지 한 통이 판을 뒤집는 장면이 꽤 나와. 비밀리에 보내는 편지, 밀서야. 전음이 있는데 왜 굳이 종이에 쓸까.
따져보니 이유가 있더라.
전음은 말이야. 듣고 나면 사라져. 증거가 안 남아.
근데 어떤 일은 증거가 필요해. 누가 누구랑 손잡았는지, 누가 뭘 시켰는지. 그건 말로는 부정하면 끝이야. 종이에 쓰고 도장을 찍어야 나중에 들이밀 수 있어.
그래서 무협에서 밀서는 대개 약속이나 음모의 증거야. 쓰는 사람한텐 믿음의 표시고, 빼앗는 사람한텐 약점이지.
밀서는 쓰는 순간부터 위험해. 그걸 뺏으려는 사람이 생기거든.
밀서를 든 사람은 쫓기고, 밀서는 이 손 저 손을 건너. 세작 얘기를 전에 적었는데, 세작이 노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밀서야. 금의위 동창 같은 기관도 결국 종이를 쥐려고 해.
그러니까 밀서 이야기는 대개 추격이 돼. 누가 끝까지 들고 가느냐.
무협 밀서엔 함정이 하나 더 있어. 가짜 밀서.
글씨를 흉내 내고, 도장을 위조해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 그래서 밀서를 받으면 진짜인지부터 확인해야 해. 신표 얘기할 때 문파 사람인 걸 증명하는 물건이 있다고 했잖아. 밀서에도 그런 표시가 숨어 있어.
객잔에 편지를 맡긴 손님 얘기를 전에 적었어. 그 손님이 봉투 끝에 작게 접은 자국을 남겨뒀더라. 나는 몰랐는데 받는 손님이 그걸 먼저 확인했어.
둘만 아는 표시였던 거야. 그걸 보고 나니까 무협 밀서가 남 얘기 같지 않았어. 종이 한 장에도 믿음이 접혀 있는 거지.
편지 한 통이 이야기를 뒤집은 장면 있으면 들려줘. 그 편지를 누가 날랐는지도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