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된 책 수십 권의 먼지를 털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켜보던 손님이 물으셨죠. 그 일 지겹지 않으세요? 그러고는 덧붙이셨습니다. 자기는 요즘 하는 일이 다 하찮게 느껴진다고, 어딘가에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을 것 같다고요.
그 질문을 오래 생각했습니다.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매일 하면 처음의 무게가 닳아 없어지죠. 결과가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큰 기계의 작은 부품 같은 일은 제 손이 무엇을 바꿨는지 알기 어렵더군요. 남의 일이 더 빛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SNS 보고 나면 지치는 이유를 적었는데, 남의 일은 늘 가장 좋은 장면만 보이니까요.
많은 사람이 의미를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 찾으면 발견할 수 있는 보물처럼요. 그래서 지금 자리를 떠나 다른 곳을 헤매게 되죠.
니체는 다르게 봤습니다. 의미는 발견되는 게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라고요. 앞서 니체 관점주의를 적었는데,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그 생각과 닿아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을 "가치를 매기는 자"라고 부르기도 하죠. 사물에 값을 매기고 의미를 주는 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손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먼지를 터는 일 자체는 하찮을지도 모른다고요. 다만 저는 이 책이 다음 사람 손에 깨끗하게 닿는 장면을 떠올리며 턴다고.
같은 일이라도 그 일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볼 때 무게가 달라집니다. 일이 바뀐 게 아니라 제가 매긴 값이 바뀐 거죠.
하찮은 일은 없다. 값을 매기지 않은 일이 있을 뿐이다. 값을 매기는 손은 네 손이다.
제 일이 닿는 사람을 한 명 떠올려 보십시오. 보고서를 읽을 사람, 물건을 받을 사람, 책을 빌릴 사람이요. 일 가운데 좋아하는 조각을 찾으십시오. 전체가 지겨워도 한 조각은 좋아할 수 있더군요. 작은 기준을 하나 세우십시오. "이건 내 방식으로 한다"는 것 하나. 그게 일을 제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도 다른 길이 필요하다면 찾으십시오. 의미를 만드는 연습을 해 보고도 아니라면, 그때는 떠나는 것도 제가 매긴 값의 결과겠죠.
그 손님은 한참 생각하시더니 웃으셨습니다. 자기 일에도 누군가 손에 닿는 장면이 있을 것 같다고요. 다음 주에 오셔서, 그 장면을 하나 찾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는 일이 하찮게 느껴지는 날은 또 올 겁니다. 그래도 저는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 지금 하는 일 위에 제가 매긴 값을 하나씩 쌓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