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이 하루 늦은 손님이 계셨습니다. 연체료도 없고 다음 예약도 없는 책이었죠. 그런데 몇 번이고 사과를 하시더군요. 이런 거 잘 지키는 편인데 정말 죄송하다고요.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표정이 잘 안 풀리셨습니다. 그분은 아마 남이 하루 늦었다면 웃으며 넘기셨을 테죠.
이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몇 가지가 겹쳐 있더군요.
제 사정은 다 알기 때문입니다. 남의 실수는 결과만 보이는데, 제 실수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까지 다 눈에 들어오죠. 기준이 높습니다. 남에게는 평균을 기대하면서 저에게는 최선을 요구합니다. 칭찬받던 방식이 굳었습니다. 잘 지키고, 실수 안 하는 아이라는 말이 익숙했던 분들이죠.
그래서 이 엄격함은 게으름의 반대편에서 생깁니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이 덫에 잘 걸리더군요.
적당한 엄격함은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다만 지나치면 이렇게 됩니다.
작은 실수를 오래 붙잡습니다. 앞서 지난 일이 자꾸 떠오르는 마음을 적었는데, 그 장면이 거의 늘 제 실수죠. 시작을 망설입니다. 실수할까 봐 아예 손을 안 대게 됩니다. 남의 너그러움을 못 받습니다. 괜찮다는 말이 위로가 아니라 봐주는 말처럼 들리니까요.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적은 언제나 너 자신일 것이다. 동굴과 숲에서 너는 너 자신을 노리며 숨어 있다고요.
니체는 그래서 저와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길을 지나 창조하는 자가 되라고 하죠. 저를 다그치는 힘을 저를 만드는 힘으로 돌리라는 겁니다.
너를 심판하는 데 쓰는 힘의 절반만 너를 세우는 데 써라. 그것으로 이미 너는 달라진다.
남이었다면 뭐라고 했을지 물어보십시오. 같은 실수를 친구가 했다면 제가 건넬 말을, 저에게도 그대로 건네 보는 겁니다. 실수와 저를 떼어 놓으십시오. "하루 늦었다"는 사실이지, "나는 엉망이다"는 사실이 아니죠. 고칠 것 하나만 남기십시오. 반성은 다음을 바꾸는 데서 끝나야 합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자책은 덤일 뿐이죠.
그 손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분이 하루 늦었다면 뭐라고 하셨겠느냐고요. 잠시 생각하시더니 웃으셨습니다. "괜찮다고 했겠죠." 그 말을 본인에게도 해 보시라고 했더니 한결 표정이 풀리셨습니다.
저를 다그치는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죠. 그래도 저는 남에게 건네던 너그러움을 한 번씩 저에게도 건네면서, 다그치는 대신 세우는 쪽으로 저를 만들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