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 밤새 만든 제안서가 회의 5분 만에 접혔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방향이 바뀌었다"는 한마디였다고요. 그 분은 공허했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분은 큰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낸 다음 날 아침, 비어 있는 할 일 목록을 보고 한참 앉아 계셨답니다. 그분은 허무했다고 하셨고요. 두 분의 이름을 서로 바꾸면 정확해집니다.
허무와 공허는 둘 다 마음 한가운데가 비어 버린 듯한 감정입니다.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멍하니 있게 됩니다. 비어 있다는 점이 같으니 섞어 쓰시는 거죠. 그렇다면 무엇이 둘을 가를까요?
허무는 애쓴 것이 아무 의미 없게 되어버린 듯한 감정이고, 공허는 채울 것이 없어 속이 텅 빈 감정입니다.
허무에는 애쓴 시간이 있습니다.
두 달의 밤샘이 5분 만에 소용없어졌습니다. 쏟은 것은 분명히 있었는데, 그게 갈 곳을 잃은 거죠. 그래서 허무는 대개 "이게 다 뭐였나"라는 말과 함께 옵니다. 의미가 있어야 했던 자리가 비어 버린 겁니다.
허무와 허탈의 차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공허와의 경계만 보겠습니다.
공허에는 잃은 의미가 없습니다.
프로젝트는 잘 끝났습니다. 소용없어진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하루를 채우던 것이 사라지자 속이 비어 버렸죠. 공허는 결과가 좋아도 옵니다. 채울 것이 없어서 오는 감정이니까요.
공허함과 상실감, 공허함과 지루함의 차이도 전에 다뤘습니다.
이렇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제안서가 접힌 분은 허무였고, 할 일 목록 앞의 분은 공허였습니다. 서로 반대 이름을 들고 계셨던 거겠지요.
허무라면 그 시간 동안 내가 얻은 것을 따로 적어보실 만합니다. 제안서는 접혔어도 쌓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허라면 다음에 채울 것을 천천히 찾으시면 됩니다. 결과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리가 비어서 생긴 감정이니까요.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텅 빈 것은 같습니다. 애쓴 것의 의미가 흔들렸는지만 보시죠.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