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 얼굴을 비춰 보던 손님이 계셨습니다. 사흘 전 동료가 "요즘 얼굴이 피곤해 보이네요"라고 했는데, 그 말이 계속 걸린다고요. 동료는 걱정해서 한 말일 텐데, 자기는 왜 이렇게 오래 아픈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많이 느낍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안의 결을 더 세밀하게 듣는 사람들이 있죠. 말투, 표정, 쉼표까지요. 저를 향한 말로 받습니다. "피곤해 보인다"가 "너는 지금 별로다"로 번역되어 들어오는 거죠. 곱씹습니다. 한 번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다시 재생합니다. 앞서 싫은 말이 오래 남는 이유를 적었는데, 그 곱씹기가 상처를 깊게 만들더군요. 지쳐 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넘길 말도, 지친 날엔 그대로 박힙니다.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들으면 결함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같은 예민함이 남의 아픔을 먼저 알아채는 힘이 되기도 하죠. 글을 쓰고, 책을 깊이 읽고, 사람을 돌보는 일에서 이 감각은 큰 재산입니다.
문제는 그 감각을 저를 찌르는 데만 쓸 때일 겁니다.
니체는 고통을 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즐거운 학문』 서문에서, 깊은 고통이 사람을 더 깊게 만든다고 말하죠. 고통을 지나온 사람은 더 섬세하게 묻고, 더 깊이 웃는다고요.
다만 그건 고통에 잠겨 있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지나서 무언가를 길어 올리라는 거였죠.
쉽게 다치는 살갗은 그만큼 많이 느끼는 살갗이다. 상처를 세지 말고, 느낀 것을 써라.
들은 말을 그대로 적어 보십시오. 제가 덧붙인 뜻을 빼고요. "피곤해 보인다"는 "피곤해 보인다"일 뿐입니다. 말한 사람의 자리에서 한 번 보십시오. 걱정이었을 가능성, 그냥 한 말이었을 가능성을요. 곱씹는 시간을 정하십시오. 오늘 저녁 십 분만 생각하고 덮는 겁니다. 예민함을 쓸 곳을 찾으십시오. 일기, 편지, 남을 살피는 일. 감각이 갈 곳이 생기면 저를 덜 찌릅니다.
그 손님께 그 말을 그대로 종이에 적어 보시라고 했습니다. 적고 나서 한참 보시더니 웃으셨죠. 쓰고 보니 정말 그 말뿐이네요, 하시면서요. 그날 저녁엔 그 동료에게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쉽게 다치는 마음은 아마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그 예민함을 저를 찌르는 칼이 아니라 세상을 섬세하게 보는 눈으로 쓰며, 제 감각을 제 쪽으로 돌려세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