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장소를 매번 상대 집 근처로 잡으신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게 편하다고 하시면서도 돌아오는 길에는 늘 피곤해하시더군요.
좋은 일을 하고 났는데 뒤가 씁쓸하면, 그건 대개 이름이 틀린 것입니다.
배려와 희생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 구별이 안 됩니다.
둘 다 상대가 편해지고 둘 다 고맙습니다. 겉에서 보면 같은 행동이죠. 그래서 상대는 뭐가 다른지 모릅니다.
갈리는 것은 내 쪽입니다. 그 일을 하고 나서 내가 줄어드느냐입니다.
배려는 여유에서 나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상대에게 좋은 쪽을 고르는 일입니다. 조금 돌아가고, 조금 기다리고, 조금 양보합니다. 그런데 그게 나를 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배려한 뒤에는 기분이 좋습니다. 준 사람도 남는 게 있으니까요.
희생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 주는 일입니다.
내 시간이 없어지고, 내 돈이 줄고, 내 몫이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하는 이유는 대개 하나입니다. 안 하면 관계가 흔들릴 것 같아서지요.
그래서 희생한 뒤에는 씁쓸함이 옵니다. 그리고 그 씁쓸함이 쌓이면 다른 이름으로 바뀝니다. 억울함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구분이 안 됩니다. 시간을 두고 보시면 됩니다.
두 번째가 표식입니다. 배려는 대가를 안 찾습니다. 이미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 했으니 돌려받을 게 없거든요. 희생은 반드시 대가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짚겠습니다. 희생을 흉으로 부르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은 자기를 깎아야 합니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 같은 것은 배려로는 안 됩니다. 문제는 그걸 배려라고 부를 때 생깁니다. 깎이고 있다는 사실이 안 보이니까 언제까지 할 수 있는지도 못 재게 되지요.
희생이라고 정확히 부르면 그때부터 기한과 한계를 셀 수 있습니다.
배려 쪽이면 할 일은 없습니다. 계속 하셔도 됩니다.
희생 쪽이면 할 일은 그만두는 게 아니라 줄어든 만큼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시간이면 몇 시간, 돈이면 얼마, 자리면 무슨 자리인지요. 적어놓으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가 보입니다.
그다음에 그 몫을 어디서 돌려받을지 정하시면 됩니다. 상대에게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데서 채울 수도 있습니다. 안 채우면 억울함으로 넘어가니까요.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상대에게 좋은 것은 같습니다. 내가 줄었는지만 세어보시죠.
구분이 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