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세 시간 동안 남의 물잔만 채우다가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못 먹고 나왔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집에 와서 화가 났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요.
여기서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배려한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도 화가 안 납니다. 화가 났다는 건 그게 배려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건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눈치를 배려라고 부르면 반드시 이렇게 끝납니다.
물잔을 채우는 행동은 똑같습니다. 먼저 자리를 내주는 것도, 말을 아끼는 것도 똑같습니다. 밖에서 보면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갈리는 건 그 행동이 누구를 향하느냐입니다.
배려는 상대를 향합니다. 상대가 편해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가 알려지든 말든 목적은 이미 달성됩니다.
눈치는 나를 향합니다. 상대의 반응을 살펴서 내가 안전해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상대가 알아주지 않으면 목적이 달성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끝내 모른다고 해도 그 일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이 정확한 이유는, 마음의 착함을 안 묻고 목적지를 묻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냐 아니냐를 재는 게 아닙니다. 그 행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만 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눈치는 능력입니다. 상대의 상태를 빠르게 읽는 건 아무나 못 합니다. 문제는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걸 배려라고 잘못 적을 때 생깁니다.
배려로 적어두면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되니까, 기대하고 있는 자기 마음을 숨기게 됩니다. 숨긴 기대는 사라지지 않고 원망으로 바뀝니다. 세 시간 뒤에 화가 나는 건 그래서지요.
눈치라고 정확히 적으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원망이 안 생깁니다. 나를 지키려고 한 일이라고 적었으니 상대에게 청구할 것이 애초에 없어지거든요.
배려 쪽이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눈치 쪽이면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무엇이 두려운지 한 줄로 적는 것입니다. 미움받는 것인지, 무례하다는 말인지, 특정한 사람의 표정인지. 적어보면 대개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로 좁혀지면 선택지가 생깁니다. 계속 살필 수도 있고, 그날 하루는 안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두려운 것이 이름을 갖기 전까지는 그 선택지가 아예 안 보입니다. 이름이 없으면 그냥 계속 살피게 되는 겁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누군가를 살피느라 지치셨다면 하나만 물어보시죠. 그 사람이 몰라도 하셨겠습니까.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