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관한 책을 세 권 빌려 가신 손님이 계셨습니다. 두 주 뒤 반납하시는데, 세 권 모두 펼친 흔적이 없더군요. 손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읽으면 용서해야 할 것 같아서 못 펼쳤다고요.
그 말이 정직하게 들렸습니다. 용서가 안 되는 마음을 이만큼 그대로 말하는 분은 드물죠.
용서가 의무처럼 들립니다. 좋은 사람이라면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깔려 있죠. 그러니 용서가 안 되는 제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상대의 잘못이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용서하면 그 일이 없던 일처럼 될까 봐 두렵죠. 아직 다친 자리가 아픕니다. 아물기도 전에 용서부터 하라니, 순서가 바뀐 느낌이 듭니다.
이 셋을 한데 묶으면 더 무거워집니다.
용서는 제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원망을 내려놓는 쪽이죠. 잊음은 기억이 흐려지는 일입니다. 용서해도 기억은 남을 수 있습니다. 화해는 두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용서했다고 다시 가까워져야 하는 건 아니죠.
그 손님께 이 구분을 말씀드리자 표정이 조금 풀리셨습니다. 다시 만나야 하는 줄 알았다고요.
니체는 남을 원망하며 그 원한을 곱씹는 마음, 르상티망을 오래 경계했습니다. 앞서 그 뜻을 적었는데, 원한은 남을 향하지만 붙들고 있는 건 저라는 이야기였죠.
그렇다고 니체가 억지 용서를 권한 것도 아닙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오히려 꾸며 낸 너그러움을 의심합니다. 속으로는 원망하면서 겉으로 용서하는 척하는 것, 그건 원한을 더 깊이 숨기는 일일 수 있으니까요.
거짓 용서는 상처 위에 덮은 천일 뿐이다. 먼저 상처를 보아라. 그다음에 무엇을 내려놓을지 네가 정하라.
용서를 미뤄도 됩니다. 용서는 정해진 기한이 있는 일이 아니죠. 그 일이 제게 남긴 것을 적어 보십시오. 화, 억울함, 서운함. 이름을 붙이면 조금 거리가 생깁니다. 그 사람 말고 제 하루에 마음을 쓰십시오. 원망을 붙들고 있는 시간만큼 제 하루가 줄어드니까요. 언젠가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만 남겨 두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이미 한 걸음입니다.
그 손님은 다른 책 한 권을 빌려 가셨습니다. 용서 얘기가 아니라, 상처 얘기가 담긴 에세이였죠. 이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용서는 언젠가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용서해야 한다는 짐을 먼저 내려놓고, 제 마음이 다시 제 것이 되는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