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작품을 두 분이 얘기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은 영상으로, 한 분은 책으로 먼저 보셨죠.
같은 장면을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시더군요. 순서가 그만큼 크게 작용합니다.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인물과 배경이 이미 그려져 있으니 책이 훨씬 빨리 읽히죠. 앞서 두꺼운 책 못 읽는 이유에서 적었듯 시작이 제일 어려운데 그 벽이 없어집니다.
대신 얼굴이 고정됩니다. 책을 읽는 동안 그 배우가 계속 따라옵니다. 원래는 읽는 사람이 채워야 할 자리인데 그게 이미 채워져 있는 거죠.
그리고 결말을 압니다. 앞서 결말을 먼저 보는 버릇을 적었는데, 이 경우가 그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은 그림이 생깁니다. 그게 이 순서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큽니다. 인물의 목소리와 방의 냄새를 내가 정하게 되죠.
대신 영상을 보면 대개 실망합니다. 내 그림과 다르니까요. 그리고 원작에서 빠진 대목이 눈에 걸립니다. 두 시간에 담으려면 반드시 덜어내야 하는데, 읽은 사람은 그 덜어낸 자리를 압니다.
정답이 있는 물음은 아니더군요. 다만 이렇게 갈라보시면 됩니다.
한 가지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게 있습니다. 두 개를 붙여서 보지 마십시오.
바로 이어 보면 계속 비교하게 됩니다. 몇 달 두고 보시면 그 비교가 약해지고, 각각을 그 자체로 보게 되죠. 앞서 다시 읽기에서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읽힌다고 적었는데 같은 이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영상은 원작의 번역에 가깝습니다.
앞서 번역본 고르는 얘기에서 옮기는 사람이 무엇을 포기할지 정한다고 적었는데, 영상도 같습니다. 옮기는 매체가 다르니 그대로 옮기는 게 오히려 실패가 되죠.
그래서 저는 요즘 두 개를 같은 작품으로 안 봅니다. 그러고 나니 실망하는 일이 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