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화가 났던 자리에서는 웃고 나왔습니다. 그러고 며칠 뒤에 아무 상관 없는 일로 크게 화를 냈네요.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게 들리더라고요. 다 내고 나서 제일 놀란 건 저였습니다.
그때 화를 낸 일은 사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어요.
일이 열이면 화는 백쯤 나갔습니다. 받은 쪽은 영문을 모르겠지요. 저도 하면서 알았어요. 이건 지금 이 일 때문이 아니라는 걸요.
삼킨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나중에 다른 문으로 나올 뿐이다.
이상한 건 아무 데서나 터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세게 나온 자리에서는 안 터져요. 대개 만만한 쪽, 잃을 게 없는 쪽에서 터집니다. 가까운 사람이거나 저를 봐줄 사람이거나요. 그러니까 화는 제 딴에는 안전한 데를 고른 셈이군요.
그게 알고 나면 더 미안한 부분입니다.
저는 참는 걸 오래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참았다기보다 미뤄둔 것에 가깝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안 낸 게 없어진 게 아니라 어딘가에 그대로 있었던 겁니다. 착해서 참은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낼 힘이 없었던 거고요.
그럼 그때 냈어야 하냐고 하면,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관계가 걸려 있고 자리가 걸려 있으니까요. 그 자리에서 내는 게 늘 가능하지는 않은걸요. 그래서 저는 이걸 성격 문제로만 보지는 않게 됐습니다.
대신 그날과 터지는 날 사이에 자리를 하나 두려고 합니다.
집에 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몇 줄 적어요. 잘 쓸 필요도 없고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적고 나면 그게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게 되더군요.
어디 있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꽤 다릅니다.
그래도 또 터질 겁니다. 그건 알아요.
그럴 땐 상대한테 늦게라도 말합니다. 그날 일 때문이 아니었다고요. 그거 하나 말해두면 그 사람이 자기 탓으로 안 가져가더라고요.
오늘 엉뚱한 데서 터지셨다면, 그 화가 어디서 왔는지만 나중에 한 번 찾아보셔도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