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안내서를 빌리러 오신 손님이 수첩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이미 시간표가 빼곡했죠. 아홉 시 출발, 열 시 반 도착, 열한 시 박물관. 그러고는 한 칸을 가리키며 물으셨습니다. 여기 빈 한 시간을 뭘로 채울까요?
모르는 게 불안합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태가 견디기 힘들죠. 시간을 낭비하기 싫습니다. 빈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앞서 쉬는 걸 미안해하는 마음을 다룬 글이 있는데, 그 마음과 닮아 있더군요. 실패를 미리 막고 싶습니다. 계획을 세우면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 같으니까요. 계획 자체가 즐겁습니다. 이건 나쁜 게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 설레는 분들도 많죠.
계획은 쓸모가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게 해 주고, 하고 싶은 걸 놓치지 않게 해 주죠. 문제는 계획 밖의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길이 막히거나, 가게가 문을 닫거나. 그때 하루 전체가 무너진 것처럼 느껴진다면, 계획이 저를 돕는 게 아니라 붙잡고 있는 거겠죠.
차라투스트라는 제3부에서 하늘을 보며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것 위에 "우연"이라는 하늘이 있다고요. 모든 것이 목적에 묶여 있지 않고, 우연의 발로 춤출 수 있다는 걸 기뻐하죠.
니체에게 우연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계획에 없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모든 시간을 짜 둔 자에게는 놀라움이 찾아올 문이 없다. 하루에 한 칸은 비워 두어라. 우연은 그 칸으로 들어온다.
빈칸을 계획하십시오. 우습게 들리지만 효과가 있습니다. "두 시부터 세 시는 비워 둠"이라고 적어 두는 거죠. 작은 데서 시작하십시오. 여행 전체가 아니라 저녁 한 끼만 정하지 않고 가 보는 겁니다. 틀어진 계획을 기록하십시오. 계획이 틀어진 날 무엇을 했는지 적어 보면, 의외로 좋은 기억이 많더군요. 계획의 목적을 떠올리십시오. 계획은 즐겁기 위해 세운 겁니다. 계획을 지키느라 즐겁지 않다면 순서가 바뀐 거죠.
그 손님께 그 한 시간은 비워 두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손님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셨죠. 여행에서 돌아와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시간에 골목에서 작은 책방을 발견했는데, 그게 제일 좋았다고요.
계획은 앞으로도 제 하루를 지켜 줄 겁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이에 빈칸 하나를 남겨 두고, 우연이 들어올 자리를 제 손으로 만들어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