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관 무렵 손님 한 분이 물으셨습니다. 아모르 파티가 원래 무슨 말이냐고요. 노래로만 들어서 신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누가 철학자 말이라고 하더랍니다.
맞습니다. 노래 제목이 되기 훨씬 전에 니체가 쓴 말이죠.
라틴어입니다. 아모르(amor)는 사랑, 파티(fati)는 운명을 뜻하는 말의 한 형태죠. 합치면 "운명에 대한 사랑", 흔히 "운명을 사랑하라"로 옮깁니다.
뜻만 놓고 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건 그 뒤겠죠. 운명을 사랑한다는 게 대체 어떤 상태일까요.
니체는 『즐거운 학문』 제4부를 여는 대목에서 이 말을 씁니다. 새해 결심처럼 적은 짧은 글이죠. 요지는 이렇습니다.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 싶다. 추한 것과 싸우지 않겠다, 탓하지 않겠다, 탓하는 사람조차 탓하지 않겠다. 눈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되게 하겠다. 언젠가는 긍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말년의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한 번 더 나옵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재는 공식이 아모르 파티라고 하더군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필연을 견디는 것으로 모자라고, 숨기지도 말고, 사랑하라고요.
여기서 많이들 헷갈리십니다. "어쩔 수 없지, 받아들여야지"와 무엇이 다르냐고요.
체념은 등을 돌리는 자세입니다. 바꿀 수 없으니 더는 보지 않겠다는 거죠. 아모르 파티는 반대로 정면을 보는 자세에 가깝습니다. 일어난 일을 다 끌어안고, 그걸 재료 삼아 다음을 빚겠다는 쪽이죠.
그래서 이 말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니체가 평생 몸이 성치 않았고 교수 자리도 일찍 내려놓았다는 걸 떠올리면, 이 말이 얼마나 힘을 들여 나온 말인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일어난 일을 저주하는 자는 두 번 진다. 한 번은 그 일에, 한 번은 자기 원한에.
노래가 틀렸다고 말씀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신나게 부르는 그 기분도 이 말의 한쪽 얼굴이죠. 다만 원래 자리에서는 조금 더 무겁습니다. 기쁜 날에만 부르는 말이 아니라, 안 풀린 날에 더 필요한 말이었으니까요.
손님은 서가에서 『즐거운 학문』을 찾아 그 대목을 한참 보시더니, 휴대폰으로 한 쪽을 찍어 가셨습니다. 빌려 가시진 않았죠.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랑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 갈 수는 있겠죠. 이미 일어난 일은 못 바꿔도, 그 일이 내 이야기에서 어떤 장이 될지는 제가 씁니다.